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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 - 충남 서산시

연서화 티스토리 2008. 6. 29. 05:11

개심사

 

개심사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에 있는 절.

 

개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654년(무열왕 1) 혜감국사(慧鑑國師)가 창건할 당시에는 개원사(開元寺)라 했는데, 1350년(충정왕 2) 처능대사(處能大師)가 중건하면서 개심사라 했다고 한다. 1484년(성종 15)에 대웅전을 중창했으며 1740년 중수하고 1955년 전면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전체적으로 구릉형을 따르면서도 산지형(山地形)으로 변천한 일탑형(一塔型) 가람배치를 보인다. 평탄한 지역에서 북으로 자연계단을 오르면 3단 가량으로 조성된 평탄한 사지(寺址)가 보인다. 2단에 안양루(安養樓)가 남면(南面)하여 서 있고 중정(中庭)으로의 입구는 안양루와 무량수전(無量壽殿) 사이의 협소한 가설문으로 되어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尋劍堂)과 무량수전이 있고 정면에 안양루가 있는 표준형이다. 이외에도 명부전(冥府殿)과 팔상전(八相殿) 등의 당우가 남아 있다.
 
 
해미면에서 6km쯤 떨어진 상왕산(307m)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개심사는 충남 4대 사찰 중의 하나다. 주차장에서 절마당에 이르는 굽이진 산길이 호젓하고 아름다운데 봄철에는 벚꽃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개심사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단층 맞배집으로, 그 구조 형식은 다포집 계통과 주 심포집 계통의 기법을 혼합한 절충식이다. 1484년, 성종 15년에 지어졌으며, 보물 제 143호로 지정되어 있다. 휘어진 나무를 그대로 기둥으로 삼아 지은 절집이 있어 눈에 띈다.
 
 
개심사 대웅전(開心寺 大雄殿): 보물 제143호
 
개심사는 상왕산 남쪽에 자리 잡은 깊은 골 안에 구릉을 정지하여 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급한 구릉에 자리 잡고 있는 까닭에 넓은 대지를 확보하기 어려워 대지의 깊이에 비해 좌우 폭이 넓다. 중정을 중심으로 동측 후면에 대웅전(大雄殿), 서측 전면에 안양루(安養樓), 북측과 남측에 심검당과 무량수전이 각각 배치되어 있으며, 중정 가운데에는 5층 석탑이 있다. 무량수전(無量壽殿)의 남측으로 요사채가 이어지면서 또 하나의 작은 안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사찰의 중심영역에서 남측에 따로 떨어져 명부전(冥府殿)이 배치되어 있다.
개심사 사적기에 의하면 651년 백제의 의자왕 14년에 혜감국사가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350년(고려 충정왕 2)에 처능대사가 중건하고 이름을 고쳐 개심사라 하였다. 그러나 성종 초에 삼중창한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 이전에 창건된 사찰임은 분명하다. 조선 성종 때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그 후 1613년(광해군 5)에 인정(仁定)·부익(富益)·현오(玄悟) 세 대사가 공동으로 대웅전 이하 각 전각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대웅전 건물은 1941년 해체수리공사 때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1484년에 처음 건립되었음이 밝혀졌다.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

 

[개심사 대웅전 공포]
개심사는 상당히 높은 산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입구에서 강당인 안양루까지 이르는데 100단이나 되는 긴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안양루는 전체의 중심축 상에 위치하나 건물방향은 동측으로 약간 틀어져 가장 전망이 좋은 방향에 면하고 있다. 안양루 옆에는 작은 진입문인 해탈문(解脫門)이 있어, 대웅전 앞마당으로 진입하게 되는 우각진입(隅角進入)의 방식을 취한다. 충남 일대의 사찰에서 흔히 보이는 이 진입방식은 대웅전의 측면(박공면)을 보면서 진입하도록 되어, 박공지붕인 대웅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봉안한 전각으로 대웅이란 말의 뜻은 인도의 옛말 마하비라를 한역한 것이다.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컫는 데서 유래한다. 개심사 대웅전은 창건 당시의 기단 위에 1484년 중창한 다포식 건축양식으로 그의 수법이 미려하여 조선 초기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으며, 덤벙주초 위에 배흘림이 있는 원주를 세웠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짜 올렸으며, 내 3출목, 외 2출목으로 외부로 뻗은 제공은 쇠서형으로 만들고 내부는 운공형으로 만들었다. 기둥 상부에서 창방과 평방을 걸치고, 각 칸에 2조씩의 공포를 짜 올렸다. 종보 위에 파련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올렸다.
종보 전후로 작은 우미량(牛尾樑)을 걸고, 내목도리를 올렸다. 이러한 우미량은 수덕사 대웅전에서 구조미를 완벽하게 구사한 사례가 있다. 우미량을 구조적으로 잘 표현한 것은 주로 고려 때이며, 그 이후로는 그 기술이 서툴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건물에서는 우미량이 부분적으로 사용되어 고려의 기술적 맥락이 이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개심사 대웅전은 몇 채 남아있지 않은 임진왜란 이전 건물이며, 구조형식상 주심포계에서 다포계로 이전해가는 과정상의 절충형식이라는 데서 그 가치가 높다.
  도면 및 이미지  
[대웅전 평면도]
[대웅전 정면도]

[대웅전 우측면도]

 

 

 

개심사영산회괘불탱(開心寺靈山會掛佛幀): 보물 제1264호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으로, 괘불이란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 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불교그림이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석가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난 우견편단의 옷을 걸치고 화면 중앙에 서 있으며 둥근 얼굴, 비대한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옷에는 둥글고 변형된 덩굴무늬가 빽빽하게 장식되어 있고, 석가모니불 뒤의 광배에는 모란 줄기와 연꽃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석가의 머리 주변엔 7구의 화불이 둥글게 앉아 있으며, 옆으로는 2구의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이 석가를 협시하고 앉아 있다. 석가의 몸통 주변에는 8구의 화불이 좌우로 앉아 있으며 맨 아래 부근에는 2구의 제석천과 범천이 손을 모은 자세로 석가를 향해 서 있다.

조선 영조 48년(1772)에 그려진 이 그림은 임금과 왕비, 세자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주로 붉은색과 녹색을 사용하였고 아름답고 복잡한 문양에서 매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이 괘불도는 입상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상의 비로사나불과 노사나불을 협시로 한 영산회상도로서 삼신불화의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본존인 석가불을 화면 가운데 크게 강조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만들고 있는데 둥근 얼굴과 비대한 두 어깨, 유난히 길고 굵은 팔, 짧은 하체 등은 비현실적이다. 불의 안에는 원문과 보상화문을 빽빽하게 장식하였고, 거신형 광배 안에는 모란당초 무늬와 연화, 변형된 화문 등으로 가득 채웠다. 이중륜광을 지고 있는 비로사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을, 노사나불은 두손을 어깨 부근에서 들어 올려 설법인을 취한 전형적인 모습인데 본존에 비해 아주 작게 묘사되었다.

두광의 화염문(火焰紋)에 장식된 일곱 구의 화불은 이중륜광에 통견의 불의를 입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한 형상으로 각기 수인과 지물을 달리하여 변화를 주고 있다. 즉 오른쪽으로부터 악기·금강저(金剛杵)·선정인(禪定印)·설법인(說法印)·연화·지권인·변형된 설법인이다. 신광의 여덟 구의 화불은 오른쪽으로부터 설법인·연화·변형된 설법인·선정인 등의 순서를 보이고 있으며, 신광의 맨밑에는 입상의 제석천과 범천이 원형 두광과 거신형 광배를 지고 합장한 자세로 본존을 향하고 있는데 형상은 보살의 전형적인 모습인 화관에 천의를 걸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석가불의 좌우 협시보살인 문수·보현보살의 형상으로 오해하기 쉽다.
 
이 괘불도는 괴량감과 비대감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비현실적인 신체비례와 복잡하게 도안화한 문양에서 18세기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보살중과 십대제자, 사천왕상을 배제하고 화불로만 본존을 협시하는 무량사 미륵불괘불탱(1627, 보물 제1265호)과 금당사 괘불탱(1692, 보물 제1266호)의 구성과 유사한 독특한 도상을 보이고 있다. 홍색과 녹색의 주조색은 신광안의 문양과 어우러져서 화려한 분위기를 이끌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임금과 왕비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개심사명부전(開心寺冥府殿): 문화재자료 제194호
 
 
절의 기록에 의하면 개심사는 신라 진덕여왕 5년, 백제 의자왕 14년 혜감국사가 지었다고 되어 있는데, 진덕여왕 5년(651)과 의자왕 14년(654)은 다른 해에 해당한다. 개심사 경내에는 보물 제143호로 지정된 개심사대웅전을 비롯하여 명부전, 심검당, 무량수각 등 여러 건물이 남아 있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 전당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24년(1646)에 세웠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의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천장의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기둥이 없어서 넓어 보이는 공간에 천불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十王像)을 모시고 있다.

 
개심사(開心寺)의 우편에 위치(位置)한 건물이다. 건립년대는 조선 고종 26년(1889)에 죽포 김설제(竹圃 金說濟)가 작성한 개심사중창수리기(開心寺中創 修理記)란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인조 24년(1646)에 신축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기단은 다듬은 돌로 가지런히 쌓았고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에 단층, 익공계(翼工系)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건물내부의 가구는 무고주 5량으로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아 공간이 넓은 편이며 천정은 연등천정으로 평주에 걸친 대들보위에 익공형 화반(花盤)을 얹고 화반위에 장혀와 중도리를 놓은 다음 충도의 사이에 종량을 걸치고 그 가운데 키가 큰 화반을 놓아 마루도리를 받치게 하였다.
 
 
개심사심검당(開心寺尋劍堂): 문화재자료 제358호
 
 
 
심검당은 건축연대를 기록한 문헌이 없어 지은 시기를 알 수 없고 단지 조선 성종 15년(148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인데 건물 왼쪽에 앞면 3칸·옆면 5칸 규모의 덧집이 붙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축년대(建築年代)를 기록한 문헌(文獻)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조선 성종실록에 성종6년(1475) 6월에 충청도 절도사 김서형(金瑞衡)이 가야산에 사냥을 나왔다가 산불을 내어 개심사의 건물이 화재로 전소된 것을 성종 15년(1484)에 대웅전(大雄殿)을 비롯 건물을 중창했다는 기록과 1914년도에 대웅전 건물을 해체 보수당시 마루도리속에서 조선 성종 15년(1484)에 중창했다는 묵서명이 발견되어 심검당(尋劍堂) 건물도 이때에 같이 중창된 것으로 추정된다.

심검당(尋劍堂)의 건축(建築)양식을 살펴보면 화강석재를 견치석으로 쌓은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우고 주두(柱頭)위에 공포(供包)를 짜올린 주심포계(柱心包系) 양식이며 가구는 5량집이다.

초제공 밑 주두 아래로 운각(雲刻)을 한 보아지 형식으로 되어 있어 익공계와도 비슷한 점이 있다.

심검당의 평면배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며 건물의 좌측에 정면 3칸, 측면 5칸의 덧집을 달았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건물총면적은 111.4㎡(심검당 63.2㎡, 덧집 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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