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미술

서양미술사 총정리 4 (신고전주의 ~ 후기인상주의)

연서화 티스토리 2008. 12. 4. 07:37

 

19. 신고전주의

1. 개념

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신고전주의 예술은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표현의 명확성,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며, 특히 미술에서는 엄격하고 균형잡힌 구도와 명확한 윤곽, 입체적인 형태의 완성등이 우선시된다.
고대에 대한 관심은 18세기 중반에 이루어진 폼페이와 헤리클라네움, 파에스툼등의 고대건축의 발굴과 동방여행에 의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 등이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혁명 전후 고대에 대한 동경이 사회 전반을 풍미하였다.
프랑스에서의 신고전주의 운동은 로코코 양식의 번잡스러움에 대한 일종의 반발, 루이 14세 시기의 그랜드 매너에 대한 향수, 푸생의 고전주의에 대한 회귀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면서 강한 도덕적 합의도 함께 이루어졌다. 또한 사회의 제반 혁명적 변화나 시민사회의 삶 속에 "고대 로마적" 덕성을 세워보고자 하는 욕구 등이 이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2. 역사적 배경과 그 성격

루이 15세와 16세의 통치기간에 이르는 시기가 그 주요 연대로서 전대의 태양왕의 철저한 섭정이후 혼란이 한꺼번에 몰아닥친 시기이다.
따라서 혁명의 기운과 전대의 화려한 정치 성향의 귀족, 의식이 싹트는 시민계급의 성장의 정치적 위기, 한편 현대를 예고하는 계몽주의 사상의 성장이 혼재 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과 개개인의 자유, 애국심들이 얽힌 감정의 출구가 필요했다. 예술계에서 신고전주의는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은 그들의 이상에의 갈망을 행동과 사상으로 만들어야 했다.
여기서 미술에 나타난 주조는 신고전주의의 경우 "고전미"가 그 흐름의 주요 성격에 보이는 것이다. 혁명정부의 새단장은 고전주의의 복귀로 그 성격을 드러낸다. 특히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그 아름다움은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대"로 칭송받으며 1775년 빙켈만의 「그리이스미술 모방론」이란 저서에서 그 이상미가 재평가 받는다.
그 결과 고대에의 관심을 팽배하였고, 고대의 특징 즉, 명석한 판단에 따른 절제되고 철저한 정확성은 혁명정부가 바라던 이상을 적확하게 구현시키기에 알맞았다.
로코코시대가 취한 과도한 사치와 화려는 혁명정부의 첫 번째 숙청과제였기 때문이다.
순수하되 명확하고 강직한 선, 균형과 조화, 안정과 형식미의 존중은 고전주의를 계승하는 신고전주의가 취한 특징이다.
오히려 더 완강하고 절제된 선과 색으로 더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바로크 시대의 연장선 상에서 Poussain적인 회화의 계승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주제에 드러나 확실한 정치적 의지에 근거한 의도적인 소재, 더 철저하고 절제된 선묘는 더욱 심화된 고전미를 나타낸다.
한편 공간의 압축화, 실제 사건의 주제화 등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자 마지막 고전주의자인앵그르에 드러나는 동방취미, 왜곡된 표현은 시대에 부합하는 취미 변화의 반영이자 "낭만정신"이 깔린 기저를 드러내는 단적인 예로써 새로운 미의식의 예고라 할 수 있겠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

뚜렷한 정치 성향을 지닌 작가로서 나폴레옹의 선전작가이자 신고전주의의 실제적인 구체적 실현을 이룬 예술가이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브루터스와 그의 죽은 아들" 등은 고대에서 빌어온 주제로서 정의 실현을 위한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다.
그 표현된 공간은 고대의 확장된 공간미를 넘어선 오히려 압축된 공간의 사용으로 연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고전미와 더불어 현대적인 요소로의 전환이 드러나고 있다.
또 "마라의 죽음" 등에서 나타난 실제 사건의 주제화는 은유와 비유를 통한 고대 신화를 한층 더 대범하게 표현하고 있다. 단순한 배경은 그 죽음의 비장미를 더욱 강화시키면서 그 죽음을 영욱적이고 숙엄한 주제로 끌어 올리고 있다.
이러한 것은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비롯된 주제만큼은 엄격을 거부하고 "존재하는 모든 다양성의 수용"(로잘린 크라우스)을 보이는 예라 하겠다. "룩상부르 공원"은 그가 수감생활 중에 그린 유일한 풍경화로 정치가 내제한 그 이전의 회화세계와 다른 면모를 보인다. 즉 있는 실재의 공원의 모습은 안정적인 자연의 일면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고전적인 안정감과 덧붙임 없는 재현은 고전주의와 근대성의 새로운 이상적 만남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제국이 망하고 추방되어서도 신고전주의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로 이어서 그 정신을 잇고 있다. 앙트완느 장 그로(1771~1835)는 <아르콜 전장의 나폴레옹>에서 낭만적인 모습에 신비감과 영웅의 모습을 동시에 그려 천재성을 인정받으나 그의 감정적인 낭만 기질은 끝내 두 사조간의 갈등을 자살로 마무리한다.


앵그르 (Jean Augui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David가 신고전주의의 실현자라면 Ingres는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David가 갖고 있던 정치성을 지우고 펄저한 미의 구현에 매진한다.
그는 바로크 선상에서 이어진 푸생적인 미의 계승자로서 루벤스 정신의 계승인 낭만주의에 맞선 마지막 고전주의자가 된다. 그는 소묘가 채색보다 중요함을 강조하여 정확한 사생의 훈련을 부르짖었다. 즉 즉흥과 무질서를 경멸하도록 가르치며 실제로 그의 작품은 대체로 채색사용에 인색하다.
<오달리스크>는 그가 자주 그린 소재이다. 그의 재능은 "물리적인 정확성과 심리적인 통찰력"으로 집약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고전미에 대한 탐구에 몰두하게 하였고 수많은 여인의 누드에서 그 미학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정확한 묘사력을 가진 그가 꾀한 오달리스크의 신체의 왜곡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소묘력은 결국 수단이며 근본적인 미, 즉 아름답게 보이는 방식에 관심이 여인의 누드에 집중 되었을 때 관능미를 주목하고 그것의 부각은 왜곡된 신체미로 오히려 더 이상적인 효과를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의 저변에는 이미 이국적인 소재, 오리엔탈리즘의 경향 등을 통한 이상향의 실현이 낭만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현실도치적인 소재의 이상미 추구는 결국 낭만 정신의 결과인 것이다.

 

20. 낭만주의

일정한 사조라기보다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고전주의의 관습화, 궁정적 귀족적 기교의 수사학에 결별을 고하고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를 비역사적, 비변증법적으로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낸다.
이들은 역사발전은 그 근원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변정법적 과정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이 근본적으로 동적인 것으로 느끼기 시작하는데 우리와 우리의 문화가 끝없는 흐름 속에 있고 간단없는 투쟁 속에 있다는 생각, 우리의 정신적 삶이란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과거에서 도피처를 찾는 그들은 과거를 자신들의 모든 희망과 꿈을 충족시켜 주는 장소로 만들었고 이 도피처로부터 이념과 현실, 자아와 세계, 개인과 사회의 모든 긴장을 추방하였다. 유토피아와 동화, 무의식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무시무시한 것과 신비스러운 것에로의 도피, 꿈과 광기에로의 도피, 유년시절과 자연에의 도피는 현실에서의 책임과 고뇌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다.
낭만주의는 신고전주의의 심각함을 이어받으면서 그 영역을 넓혀가는데 자연을 더 면밀히 관찰하기도 하고 때로는 정치와 매일매일의 사건, 감정에 몰입하기도 한다.

고야 (Farancisco de Goya Lucientes 1746 ~ 1828)

과거의 인습을 벗어나 독립성을 주장하였으며 초상화나 「카프리쵸스」에칭 시리즈와 같은 새로운 주제의 에칭 등의 작품을 남겼다.
1793년 중병을 앓은 후 귀머거리가 된 그는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 칩거하여 그의 상상 속에 모여드는 유령 등에 사로잡히게 된다.
<전쟁의 참담>은 인간에게 닥칠 수 있는 끔찍한 고통과 고문을 보여준다. (거인1808~1812) 스페인이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때로 거인은 프랑스 침략에 대항하는 스페인의 저항정신을 표상할지도 모르나 그림 속의 인물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전쟁의 참상을 대하면서 느끼게 되는 인간의 무능함에 대한 알레고리인 것이다. (자화상) 그를 돌보아 주는 아내의 팔에 안겨 있는 자신을 그린 <자화상>은 어두컴컴한 뒷배경에는 악마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있다. 그의 병적인 강박관념이 나타난 "블랙페인팅"으로 넓게 칠해진 때로는 붓보다 나이프를 더 많이 사용하여 어둡고 음산한 분위기로 그려진 작품들은 20C 표현주의의 원시적 비관주의를 예고한다.

1.  영국과 미국의 낭만주의 풍경화

풍경화는 당시 유행하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운동과 장 자크 루소, 그리고 영국 호반시인의 영향 때문이었다.
실제의 전원을 의도적으로 때로는 자의적으로 감상하는 경치관광여행의 점진적인 유행은 회화와 판화의 수요를 늘게 했다. 여행과 스케치에 인기 있던 장소는 영국의 "황량한" 지역 산맥과 황무지, 사람이 살지 않는 언덕의 폐허들이었다.

컨스터블 Constable, John (1776.6.11~1837.3.31)

영국의 풍경화가. 제분업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왕립미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02년 아카데미전에 입선하였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와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화풍은 자연에 대한 관찰이 섬세하고, 영국 특유의 소박한 풍물을 묘사하였으며 밝은 색채감을 나타냈다.
특히 초록색의 발견자로서 근대 풍경화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이 감각은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프랑스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표작으로 《건초 수레》 《솔즈버리 대성당》 등이 있다.


터너 Turner, Joseph Mallord William (1775.4.23~1851.12.19)

영국의 화가. 런던 출생.
14세 때부터 로열 아카데미에서 수채화를 배우고, 이듬해 아카데미 연차전(年次展)에 수채화를 출품하였다. 그는 주로 수채화와 판화 제작으로 일생을 보냈는데, 20세 무렵에는 유화를 시작하여 풍경유채화를 전람회에 출품하기도 하였다.
R.윌슨을 비롯하여 17세기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의 영향을 받았으며, 국내 여행에서 익힌 각지의 풍경을 소재로 삼았다. 24세 때에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되고, 3년 후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02년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를 중심으로 풍경화의 소재를 모아 500점이나 되는 스케치를 남겼다.
한편, 이 무렵부터 N.푸생, C.롤랭의 고전주제적 풍경화에 끌려, 특히 구도를 잡는 방식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20년 전후부터는 그의 양식에 변화가 생겨, 자연주의적인 방향에서 벗어나 낭만적 경향으로 기울어졌다. 19년 T.로렌스의 권유에 따라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색채에 밝기와 빛을 더하게 되었다. 《전함 테메레르:The Fighting Temeraire》(1838) 《수장(水葬):Peace:Burial at Sea》(43) 《비·증기·속력》(44) 《디에프항》 《노럼성과 일출》 등의 대표작은 그의 낭만주의적 완성을 보여준다. J.라스킨의 절찬을 받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주목받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망명해온 그 후의 인상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 독일의 낭만주의

독일 낭만주의는 풍경화, 상징주의, 민족적 중세주의의 세가지 양식으로 표현하였으며 시각적 강렬함에서는 영국과 가깝고, 더 엄숙한 성격을 띠고 뚜렷하게 종교적 주제 다루었다.

프리드리히 Friedrich, Caspar David (1774.9.5~1840.5.7)

독일의 화가. 그라이프스발트 출생. 드레스덴에서 죽었다.
처음 코펜하겐에서 배웠으나, 1798년 이래 드레스덴에서 활약하고, 1816년 그곳의 미술학교 교수가 되었다. 가장 순수하게 독일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작가로, 풍경적인 제재(題材)에 시종하여, 특히 가을·겨울·새벽·안개·월광 등의 정경을 독특한 정적감(靜寂感) 속에 표현하였다.
작풍은 드레스덴 이외로는 거의 전파되지 않아서 독일화단에서도 잊혀졌으나, 20세기 초 이래 재평가되어 오늘날에는 19세기 전반의 가장 뛰어난 화가로 꼽힌다. 작품은 드레스덴·베를린·함부르크 등지의 미술관에 많은데, 거의가 초기·중기의 것으로 만년의 작품은 오히려 러시아 각지에 산재되어 있다.
산중의 십자가》 《북극의 난파선》 등의 작품이 전하며 그의 글도 《고백록 : C.D.F.Bekenntnisse》(1924)으로서 출판되었다.

3. 프랑스 낭만주의

제리코 Gericault, Jean Louis Andre Theodore (1791.9.26~1824.1.26)

프랑스의 화가. 루앙 출생.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이다. 1808년 파리에서 C.베르네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2년 뒤 P.N.게랭의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카데믹한 정통에 불만이 있었고 동시대인으로서는 C.I.H.그로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또 P.P.루벤스에게 매료되었다. 16년 이탈리아에 가서 고대의 작품과 르네상스의 화가들을 연구하고,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크게 받아 귀국 후 대작 《메두사호(號)의 뗏목》(1819)을 그려 일약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젊은 F.V.E.들라크루아를 감격하게 하였고, 들라크루아에 의한 낭만주의 확립의 위대한 도화선이 되었다.
메두사호의 구조된 선원들에게 실정을 듣고 뗏목을 만들게 하는 등 실감을 살린 이 그림은 격렬한 동세(動勢), 강한 명암과 색채효과 등 극적인 정경을 표현한 박진감에 있어 그 때까지의 회화에서는 볼 수 없던 극적 요소로 가득 차 있다.
20년 영국으로 건너간 후 영국의 풍경을 수많은 석판화로 묘사하고 또 말을 좋아하고 빨리 달리는 동물의 속도를 좋아하여 그 동작을 예리하게 묘사하였다.
작품으로서는 유화는 얼마 되지 않으나 그리스독립전쟁·노예제 반대 등 시국적인 것을 주제로 한 소묘에 뛰어났고 석판화를 참다운 예술품으로 끌어올린 공로자이기도 하다. 22년 런던에서 돌아와 얼마 동안 가슴을 앓다가 33세로 파리에서 죽었다.
이 밖에 주요작품에 《돌격하는 샤쇠르》 《부상당한 퀴라시에》 등이 있으며 약간의 조각작품도 남겼다.


들라크루아 Delacroix, Ferdinand Victor Eugene (1798.4.26~1863.8.13)

프랑스의 화가. 샤랑트현(縣) 생 모리스 출생.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났다.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게랭에게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루브르미술관에 다니면서 P.P.루벤스, P.베로네제 등의 그림을 모사하였고, T.제리코의 작품에 매료되어 현실묘사에도 노력하였다.
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號)의 뗏목:Raft of the Meduse》은 그에게 낭만주의를 수립하는 결정적인 감격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하여 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여기에서 엿볼 수 있는 극적인 표현은 다비드풍(風)의 고전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계속하여 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 확립시켰다.
더욱이 이때 살롱의 똑같은 방안에 진열된 영국의 J.콘스터블의 풍경화의 밝은 색조에서 자극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밝게 새로 칠하여 한층 더 강렬한 효과를 나타냈다. 다음해 런던에서 R.P.보닝턴, J.P.로런스 등과 사귀는 동안 더욱더 빛깔의 명도와 심도를 증가시켰다. 즉, 자신과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 후 수년 간의 작품 중에서 《사르다나파르의 죽음》(27)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31)은 대작이다. 그 후에도 계속 진전하여 32년 모르네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을 수행한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고, 그의 예술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는 동시에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에서의 동방취미 풍속화의 기반을 닦았다. 명작 《알제의 여인들》(34)은 이 여행에서 얻은 훌륭한 성과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를 중심으로,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외면적인 격렬한 맛이 점차 내면화되었다. 작품으로는 이상에서 말한 대표작 이외에 초상화, 성서에서 제재를 택한 것, 말이나 사자 등의 동물을 그린 것도 많다. 더욱이 문학적·음악적인 정서도 풍부하여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일찍부터 가까이하였고, 음악가 F.리스트와 당시의 여성문학가이던 G.상드와도 친하였다.
이와 같은 풍부한 재능과 환경은, 그에게 회화작품 외에도 오늘날 미술사상(美術史上) 귀중한 문헌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는 뛰어난 예술론이나 일기 등을 집필하게 하였다. 그의 예술형성에 전술(前述)한 화가 이외에도 16세기 베네치아파 화가인 미켈란젤로나 고야도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 그 자신의 영향은 그 후의 낭만주의 회화를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E.드가와 A.르누아르에게 직접 연결되는 점도 많다. 후반기에는 교회와 파리의 공공건축물을 위한 대벽화 장식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국회 하원의 《국왕의 방》(33), 국회 하원도서관(44), 국회 상원도서관(45∼47), 파리시청의 《평화의 방》(49∼53, 소실), 루브르궁전의 《아폴로의 방》(49) 등을 잇달아 그렸고 만년에는 동판화와 석판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는데, 흑백의 대조가 강조되고 한층 더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기교로써 《파우스트 석판화집》(27) 《햄릿 석판화집》(43) 등의 걸작을 남겼다.


도미에 Daumier, Honore Victorin (1808.2.20~1879.2.11)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5세 때 유리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 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석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0년 《카리카튀르》지 창간에 즈음하여, 이 잡지의 만화기고가로 화단에 데뷔하였고, 32년 국왕 루이 필립을 공격하는 정치풍자만화를 기고하여 투옥되었다. 35년 언론탄압에 의한 이 잡지의 발행금지 후에는 사회·풍속 만화로 전환하여, 주로 《샤리바리》 지상에서 활약하였는데,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는 민중의 진정한 모습을 때로는 휴머니스틱하게, 때로는 풍자적인 유머를 담아 그렸다.
그 후 40년간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통산 4,000점에 이르고, 이 밖에 목판화가 있다.
그리고 40세경부터는 서민의 일상생활을 주제로 한 유화나 수채화 연작을 시도, 날카로운 성격묘사와 명암대조를 교묘히 융합시킨 이색적인 화풍으로 《세탁하는 여인》 《3등열차》 《관극(觀劇)》 《돈키호테》 등 걸작을 남겼다. 석판화의 대표작은 《로베르 마케르》이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게다가 만년에는 거의 실명상태로 친구가 제공한 발몽두아의 조그만 집에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코로 Corot, Jean-Baptiste-Camille (1796.7.16~1875.2.22)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처음에는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1822년부터 미샤롱과 베르탱에게 사사하여 그림을 공부하였다.
25년부터 2년간 동경하던 이탈리아에 유학, 자연과 고전작품을 스승으로 한 정확한 색가(色價)에 의한 섬세한 화풍을 발전시켜, 27년 《나르니다리》로서 살롱에 등장하였다. 그 후는 프랑스에 살면서 파리 교외의 바르비종을 비롯한 여러 곳을 찾아다니면서 많은 뛰어난 풍경화를 남겼다. 《샤르트르 대성당》 《회상》 등이 유명하며, 풍경화 이외에도 《진주의 여인》 《푸른 옷의 여인》 《샤르모아 부인상》 등이 있다.
코로의 작품은 은회색의 부드러운 채조(彩調)를 쓰면서 우아한 정경을 드높여 주어, 단순한 풍경에도 시와 음악을 부여할 수 있었다는 점이 큰 특색이다. 동시에 착실한 관찰자로서 자연을 감싸주는 대기와 광선의 효과에도 민감하여, 빛의 처리면에서 훗날 인상파화가의 선구자적 존재였다.

 

21. 사실주의

19C 사실주의 개념과 형성과정

19C 이전까지는 자연주의로서 사실주의가 정의되어왔다.
그것은 성실하고 정확한 "자연의 모방" 더 나아가 그것의 "완벽한 이상화된 재현"으로서 사실주의 였다.
19C 이르러 사실주의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사실주의 등장 이전의 낭만주의는 그 개념적인 면에서 대조가 된다.
낭만주의는 "감정"이 중요하고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결과 낭만주의 회화는 격정적이며 현실을 떠난 이상향을 ?거나 이국적인 소재등에 깊은 관심을 회화로 표현한다.
표현에 있어서는 색채에 비중을 두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화면을 구사한다. 현실을 떠난 상상력을 부추기는 소재는 따라서 시적이며 신화적인 주제를 취했다.
사실주의는 낭만정신에 전적인 반대 표명과 비판을 가한다. 특히 19C사실주의를 대표하는 쿠르베, 도미에, 밀레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들의 공통관심사는 [현실을 보는 눈] 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세 작가는 그 현실의 운을 자신의 의지와 가치에 입각해서 결과는 달리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을 묶을 수 있는 것은 [인류가 생활하면서도 간과되어온 인간생활과 그 이면의 다소 불미스럽거나 적나라한 현실을 주목하고 표현해낸 회화세계일 것이다.]
즉 사실주의만을 놓고 볼 때 19C이전과 이후의 사실주의는 전자는 다소 기술적이고 이상화된 자연의 재현으로 낭만정신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라고 볼 때, 후자는 사회참여적이고 소극적인 계몽주의-개혁 하지는 않아도 회화를 통한 적나라한 현실의 인식이라는 점에서-가 배어있는 진상(reality)과 진실(truth)을 갈구한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어서 회화를 수단으로 한 사상의 표현으로 말할 수 있겠다.
낭만주의에 대한 사실주의는 현실을 간과한 어떠한 표현도 부정한다.
사실주의 입장에서 낭만주의는 단순한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쿠르베는 "천사를 보여주면 그리겠다"는 공언으로 사실주의의 개념을 대변하며 "상상력"으로 집약되는 낭만주의와는 대조를 보인다.
따라서 주관과 객관의 극적인 대조로 나타난다. 특히 색채에 있어서도 낭만주의를 대변하는 대표시 표현수단인 현란한 색감을 사실주의는 보이는 대로의 과장없는 색감으로 결과적으로 무채색에 가까울 정도로 삭막하고 주제표현을 강화해 가장 큰 대조를 보인다.
공간 구성에 있어서도, 소재자체가 대조적인데서 비롯되어서 [사르드나팔르의 죽음] [메탄호의 뗏목]은 내용 자체가 극적이며 등장인물도 격정적인 자세의 불안할 정도의 공간배치가 나타난다.
반면 사실주의는 [돌깨는 사람] [만종]등에서 일하는 농민들의 정적인 모습과 그들의 현실공간을 재현해서 단순하고 차분한 구성을 나타낸다. 사실주의 배경에는 당시 사회의 의식의 전환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Hyppolue Tainne(텐느)과 Conte의 실증주의를 들 수 있다.
텐느의 역사관은 그 지역의 환경과 시대 사회의 관습이 그 시대의 예술가를 대변하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이러한 "당대성"인식에 주목하고 실천한 것이다.(이성주의가 팽배하여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으며 과학기술이 발달하기 시작) 한편 19C는 과학과 기술의 태동 이성주의의 팽배를 부른 계몽주의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실증주의는 경험과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인 지식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정신은 시민정신에 평등사상을 고취하는데 역할하였고 민주사상에 이어지는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더 이상 고고한 가식적 주제가 아닌 평범한 삶의 세속성이 주제로 등장하는데 정신적인 역할을 했다.

쿠르베 Courbet, Gustave (1819.6.10~1877.12.31)

프랑스의 화가. 스위스 국경 가까운 프랑슈 콩테의 오르낭 출생.
1840년 아버지의 권유로 법률연구를 위해 파리로 나왔으나 얼마 후 화가를 지망하여 화숙(畵塾)에 다니며 회화습작에 몰두하는 한편 루브르미술관에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파의 거장들의 작품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44년 살롱에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하고, 49년 《오르낭의 매장》에서는 이색적 화재를 인정받았으나 50년의 《오르낭의 장례식》은 화단의 평론을 양분하는 물의를 일으켰다. 지나치게 실경(實景) 묘사에 치우친 불경스런 희화(戱畵)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돌 깨는 사람》(1849), 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한 노작 《화가의 작업실》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이 작품의 출품을 거절당하자 몽테뉴가에 손수 가옥(假屋)을 짓고 입구에 ‘사실주의’라는 큰 간판을 걸고서, 이 작품을 비롯한 40여 점의 자작품을 전시하여 자신의 예술상 입장을 도전적으로 표명하였다.
그 후, 《센강변의 처녀들》(56) 외에 많은 수렵도, 거치른 바다풍경, 나부(裸婦) 등을 제작하였으나 71년 파리코뮌 때, 나폴레옹 1세 동상의 파괴책임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스위스로 망명하여 객사하였다. 그의 견고한 마티에르와 스케일이 큰 명쾌한 구성의 사실적 작풍은 19세기 후반의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당시의 고전주의와 같은 이상화나 낭만주의적인 공상표현을 일체 배격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묘사할’ 것을 주장한 그의 사상적 입장은, 회화의 주제를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한정 혁신하고 일상생활에 대한 관찰의 밀도를 촉구한 점에서 미술사상 가장 큰 의의를 남긴 것이다. 대표작에 《나부와 앵무새》(66) 《사슴의 은신처》(66) 《샘[泉]》(68) 《광란의 바다》(76) 등이 있다.

 

22. 인상주의

인상주의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상주의자들이 외적세계에 찾아낸 어떠한 편견,선입관에서 완전히 개방된 순수한 상태에 있는 시각적 진실이다.
인상주의자들은 사실주의의 외계에 대한 충실성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 충실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것이 빛이다.
빛을 통한 자연은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었고 형태도 일정치 않았다.
인상주의자들의 본대로 그린다는 인상주의 정신은 빛에 따라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깊이 없는 사물의 인상을 그린 것이다.
태양광선의 미묘한 조화를 쫓기 위해 이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그래서 야외주의(플레네리즘 혹은 외광주의)를 만든다. 시시각각 변하는 태양광선은 빠른 필치와 붓놀림을 요구하고 빠레뜨에서 색을 섞기 보다는 직접 화폭에서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노리며 점묘수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망막적인 효과를 노린다.
이와 같은 인상주의가 출현하는데는 사진기의 출현에 따른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회화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음을 입증해준다. 그래서 관심을 갖은 것이 시각세계이고 그 시각세계의 민주성은 근본적으로 [시각의 근본적인 혁신] 의 핵심이 된다.
변화한 시각방식을 받쳐줄 색채학의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발달은 독특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는 과거의 주제·개념 대신에 모티브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고 그 결과 국수주의적인 과묵한 주제가 아닌 새로운 변화된 세계에 들떠있는 파리의 풍물이 주된 노래가 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제를 태양광선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면 변화하는 주제를 담아내기 위한 연작형식이 유행한다.
모네가 그린 [건초더미] [루앙 대성당][수련]등의 연작에 있어 작품의 대상이 되는 사물들은 태양광선을 위한 부차적인 소재인 것이다. 이 그림은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해야 윤곽과 형태가 드러난다. 화면의 구성도 삼각형구도나 소실점이 한두개로 축약되는 선원근법적이 아닌 대기원근법을 사용한다. 그 효과는 자칫 어수선해보이나 자연스럽고 우연한 느낌의 스냅사진과 같은 연출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화를 환영으로서 인식하기를 그만두고 "평면성"의 회화를 구축하며 Modernity를 획득하고 있다. 시각의 캔버스 자체로서 인식하게 하여 더 이상의 재현적인 효과를 유발하는 허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직관에 의한 뉴앙스 이미지의 연출은 곧 추상회화가 갖는 성격을 내재하는 이와같은 인상주의는 마네로부터 언급되고 있다.
1863년에 발표된 [풀밭위의 점심]은 인상주의 운동에 적극적인 동참을 하지 않으나 주제나 조형 및 색채면에 있어서 인상주의와 직결되는 사실주의 새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상식을 벗어난 소재와 아울러 화면구성에 있어서도 각 대상은 일회적인 요소로서가 아니라 순전히 조형적인 요소로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색면의 조화도 종래의 중간색조와 칙칙한 다갈색조를 배제하고 녹색을 주조로한 전통적인 명암법에 의거하지 않는 선명한 색조로 화면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다.
파리 교외의 들놀이 퐁경에서 想을 얻은 것으로 옷입은 남자에 나체에 여자를 [전원의 합주]에서 본따고, 인물의 포즈와 배치는 라파엘로의 [퍼머스의 심판]에서 본딴 것이다 [올랭피아]는 피렌체에서 묘사한 티치아노의 작품 [우즈비노의 비너스]에서 구도를 빌어온 것으로 사실주의적 순수 회화라고 하는 회화의 새로운 영역을 제시한 작품이다 . 그림자에서 빛으로 옮기는 부분을 무시하고 그림자가 없는 피부나 검정 일색의 상의등을 단순히 색면으로 처리한 방법이 당시로서는 기이하다하여 비난을 받았다.
1856년 65년의 살롱에서 스캔들을 일으킨 것은 여성의 나신을 이상화시키지 않았고 신화나 우의의 베일로 가리지고 않은 채 제시했기 때문이다. 造形的으로도 피부의 밝은 크림색이 어두운 배경위에 펴낸것처럼 부각되는 효과는 평면적 기법으로 표현한 [풀밭위의 ~]보다 한걸음 앞선다.
19C 프랑스 관전파의 화가들은 과거의 거장들이 명암법을 준수했던 나머지 짙은 갈색을 남용했다.
그러한 가운데 밝은색조를 들라크르와가 사용하고 마네가 뒤이었다.마네는 중간톤을 싫어하고 인체나 물체의 입체성에도 화면의 패턴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대담한 채색법을 도입 [올랭피아] [풀밭~~~~]은 3차원을 2차원 평면으로의 도약이다.
"채색의 경우 빛을 도입할 때 그것과 상관해서 얼마만큼 그늘을 도입해야 하는가 하는 의무를 타파하고 밝은 색채를 밝은 색채 그것으로써 사용하는 가능성을 개척" 이것은 외광에 대한 색채처리이고 또 움직이는 현대의 처리도 문제 삼고 있다.
재생한다는 의미는 면밀한 대상의 관찰을 풍부한 색채로 종합하고 그 가운데 풍부한 형태가 자연스럽게 생긴다는 것이다.
결국 자연 대상들은 원추.원통 구형으로 축약되어지며 그의 형태는 세잔느식의 질서로서 새로이 구성된 건축적인 견고함을 갖춘 회화 세계가 된다. 일련의 [대수욕도] [빅트와르 산]이 그러한 종합적인 구축적 자연의 구현인 것이다.대상은 모두가 약간씩 다른 시점에서 면으로 분할된 밝은 색채로 구성되어 순수조형의 의지로 구현된 것이다.
따라서 말년의 그의 회화는 대상이 하나의 조형요소로서 객관화되어 밋밋하다 싶을 정도로 중성적이고 단순하게 되어 형태요소로서 왜곡되어 있을 뿐이다.
이와같이 철저한 대상의 자기화를 거친 객관화는 그것이 재현미를 떠나서 순수회화의 조형미를 위한 형태가 되어 추상화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 것이다. 즉 자연의 변화무쌍함의 일면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나름대로 질서를 부여해 생긴 형태가 극도의 주관적인 감정과 연관이 되면 곧 추상이 되는 것이라 본다.
쇠라와 세잔느의 한계는 자연세계를 주관적 화음과 질서로 통일하려고 한 것은 무질서한 자연세계와는 독립된 새로운 리얼리티의 추구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들은 인상주의 화가와 마찬가지로 보이는 세계에 머물렀고 일상적인 주제 역시 사실주의에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인상주의자들로 알려진 화가들과의 공식적인 연결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마네는 일찍이 아방가르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가 활동할 당시는 사실주의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때인 만큼 그는 쿠르베가 그의 [작업실]에서 재창조하는 영웅으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과시했다면, 마네는 물감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사실주의로부터 그는 당대의 삶으로부터 채택해 그것을 실물 크기로 그린다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접근 방법을 전통적인 도상학적 주제(iconograpic theme)에 대담하게 접합시키기 도 했고 때로는 옛거장들 특히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거장들의 양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현대 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1863년의 [낙선전]은 마네는 물론 휘슬러,피사로,세잔느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낙선전에 마네는 [풀밭위의 식사]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똑바로 앞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시선은 보는이를 화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린 방법 역시 색조의 조정에 의해 명암효과를 추구하는 전통방식을 버리고 면면이 강조되고 단일 색채로 크게 처리하여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 실제로 여과되지 않은 대낮의 광선과 세부 묘사의 단순화, 뚜렷한 실루엣, 빛나는 색채의 효과를 포착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같은해에 제작된 [올랭피아]는 역시 고전주의적 주제에서 누드를 차용하고 있는데 티치아노 이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고야의 [누드의 마야]에 이르기 까지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누드의 여체로서의 관능성, 신비로운 신화적 일면을 배제하고 창녀임을 알수 있는 도상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신있으며 저돌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재현양식은 중간색조는 사용하지 않은 단순화된 색채가 어둡고 밝게 대조되어 단조로운 색채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했다. 마네의 의의는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제 회화이 문제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에 달려있게 되는 것이다.


모네 (claude Monet 1840 ~ 1926)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모네는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앞에서 대상의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화면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마무리였다.
또한 비평가들이 격분한 이유는 그림의 기법 뿐만이 아니라 화가들이 선택한 소재에도 있었다.
그림같은 화면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그린 모네는 일상의 광경이 지니는 진정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강"은 그림속의 대상물들이 모두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고, 형태는 낱낱이 해체되어 색채의 빛으로 환원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검정색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늘 부분에도 색채가 넘쳐 흐른다.


르누아르 Renoir, Auguste (1841.2.25~1919.12.3)

프랑스의 화가. 프랑스 중부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J.A.와토나 B.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 겨우 부채그림이나 점포장식 등을 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C.모네, A.시슬레, 바지위 등을 알게 되고 또 C.피사로, P.세잔, J.B.A.기요맹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초기에는 코모, 들라크루아, 크루베 등의 영향을 받았고, 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종군한 후에는 작풍도 점차 밝아졌다. 그리하여 인상파의 기치를 든 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1874)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대작(大作) 《물랭 드 라 갈레트 Le Moulin de la Galette》(1876)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79)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그의 화풍도 마침내 한 전기(轉機)를 맞이하였다.
귀국 후 얼마 동안의 작품은 색감과 묘법(描法)이 크게 바뀌었다. 즉 담백한 색조로써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그려서 화면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은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로 《목욕하는 여인들》(1884~87) 등을 그렸다. 그 후는 완전히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90년대부터는 꽃·어린이·여성상, 특히 《나부(裸婦)》(88) 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프랑스 미술의 우아한 전통을 근대에 계승한 뛰어난 색채가로서,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리면서도 마지막까지 제작하는 기쁨을 잃지 않았다.
최후 10년 간은 조수를 써서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母子)》(16)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드가 Degas, Edgar (1834.7.19~1917.9.17)

프랑스의 화가. 본명 일레르 제르맹 에드가르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파리 출생.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장남으로, 처음에는 가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법률을 배웠으나, 화가를 지망하여 1855년 미술학교에 들어갔다.
거기서 J.A.D.앵그르의 제자 L.라모트에게 사사(師事)했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아, 평생토록 이 고전파의 거장에 대한 경의를 품게 되었다. 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심취하였다.
이 무렵부터 거의 10년간은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수업기로 오로지 고전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65년 살롱에 《오를레앙시(市)의 불행》을 출품하였다. 그 후 자연주의 문학이나 E.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근대생활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제작했는데, 74년부터 86년까지 인상파전에 7회나 출품·협력하였으나 그 후로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는 파리의 근대적인 생활에서 주제를 찾게 되자 더욱 재능을 발휘하여 정확한 소묘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을 표현하였다. 인물동작을 잡아 순간적인 포즈를 교묘하게 묘사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부분적으로 부각시키는 수법을 강조해왔다. 경마나 무희, 욕탕에 들어가거나 나오려는 여성의 한 순간의 동작을 즐겨 그렸다.
이러한 그의 눈과 기량은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 아니라, 만년에 시력이 극도로 떨어진 뒤에 손댄 조각에까지 더없는 걸작을 만들어냈다. 선천적으로 자의식(自意識)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 그의 인간혐오증은 늙어갈수록 더하여 고독한 가운데 파리에서 83년의 생애를 마쳤다. 파리 인상파미술관에 소장된 대표작 《압생트》(1876) 《대야》(86)를 비롯한 많은 작품를 남겼다.

 

23. 후기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의 뚜렷한 시각화가 이루어진 것은 1886년 제 8회 마지막 인상주의전을 들 수 있다.
기존 인상파 화가는 드가와 피사로 뿐이고 르동, 고갱, 쇠라등의 새로운 작가들이 작품이 출품되었다.
이 전시의 의미는 1880년대에 들어서면 대부분의 인상파화가들도 인상주의의 순수한 광학적 감각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란 명칭은 Roper Fry가 기획한 전시회에서 비롯하여 인상주의의 색채에 영향을 받은 계승이자 단지 시각효과를 넘어서 작가적 색채가 주관에서 비롯되는 각기 특징적인 주의로서 극복의 뜻을 담는다고 하겠다.
후기 인상주의자들은 소위 신인상주의를 포함하여 쇠라, 고호, 고갱, 세잔 등으로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에 근거한 미술을 추구하는 것이다.
화가의 눈에 의한 직접 목격된 모든 사실이 그림의 소재가 되고 자연의 탐구와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가치가 있는 대상으로 부각되는 것이 인상주의의 목적이었다.
인상주의에서 빛속에 그림의 윤곽선이 소멸되고 인상주의 화가들이 간과했던 푸생의 고전주의와 단순성, 균형, 질서, 필연적인 감각을 되살리는 데 공헌한 일련의 화가들에게 붙인 개념이다.
1910 ~ 1911년 영국의 런던에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이란 전시회에서 유래했다. 낭만주의처럼 하나의 운동이나 경향을 지칭하지 않으며 피사로, 모네, 시슬리 등의 신인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전개된 보다 견고한 화면구성과 표현 내용을 중요시 했던 경향을 말한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빛에 의해서 화면의 균형과 질서, 형태 등을 분해 했다면 이들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를 복원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회화의 장을 개척했다는데 그 공로가 있다 하겠다.
자연을 대했을 때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인상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인상주의자들이 상실했던 깊이와 불분명한 물체의 형태 즉 입체감등은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 이들 후기인상주의 화가들은 색면의 구성과 색채, 균형감, 표현에서 인상주의를 극복하고 발전하여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세잔 Cezanne, Paul (1839.1.19~1906.10.22)

프랑스의 화가.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 출생.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어린시절 친구 E.졸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59년 아버지의 권유로 엑상프로방스의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61년 그만두고 졸라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스위스로 학교를 옮겼다. 여기에서 C.피사로, A.기요맹 등을 알게 되고, 후에 인상파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 미술학교 시험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지기도 했으나 72년 퐁투아즈에서 헤어졌던 피사로와 만나 다시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하고 인상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단지 반관전(反官展)이라는 입장에서 동조하는 정도였으며, 학풍에서는 C.모네나 피사로에서 볼 수 있는 순수한 외광파(外光派)에 속하지는 않았다.
74년 제1회 인상파전에 출품한 작품에서 보여준 빛과 색의 배합은 한층 인상파작가로 접근해 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으나 제3회 인상파전을 고비로 차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이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96년 인상파그룹과 결별하고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는 작품에만 몰두하였으며 4년 후인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작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고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로 일관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큐비즘(cubisme)은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1872)이 그의 전기작품(인상파)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에스타크》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며 《목욕하는 여인들》 《생트빅투아르산》 등이 대표적인 후기작품들이다. 그 밖에 정물에 관한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고호 (Van Gogh 1853-1890)

세잔느와 쇠라가 인상주의 약식을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을 때 고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화필을 이끌어 갔다.
인상주의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충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이 점이 그의 주요관심사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자연을 재구성하지 않고 사물의 전형적인 성질을 부각했으며 사물이 가진 독특한 면을 드러내려 했다. 화면의 모든 형태는 고호 바로 자신처럼 느껴지도록 개성적인 화필과 색면으로 균형감과 움직임을 강조했다.
특히 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은 그의 그림의 특색으로 고호 자신의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명의 모든 형태를 통합하여 표현하려 했던 그의 강한 종교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형태왜곡은 추상을 예고하여 병적 심리 내면적 드라마의 표출이라는 면에서 20세기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1. 1881- 농부, 네델란드 풍경 목탄을 사용하는 드로잉이나 어두운 색의 유화가 대부분이며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기독교의 도덕성과 복합시키는 주제를 사용했다.

2. 1886 파리 밝은 광선, 색채로 덮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본판화와 베르나르의 영향으로 색채를 평면으로 강렬하게 구사하며 윤곽선을 강조한다.

3. 1888 아를르 - 가장 왕성한 시기. 대상은 야외의 풍경이나 눈앞에 보이는 것 들이지만 주제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들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느끼는 주관적 감정 세계와 작가의 직접적 통화를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인상주의를 탈피하고 있다.

4. 1889 생레미 격렬하고 충동적인 붓처리로 표현주의 성격을 강조한다. 50*100cm 크기의 수평적 캔버스가 많으며 아를르 시기의 원색 사용보다 초록색, 파랑, 검은색 사용이 특징이다. 개인적이며 어느 그림에서나 화가 자신의 감정을 쉽게 읽을 수 있다. 37점의 자화상이 남겨졌다.


고갱 (Gauguin 1848-1903)

폴 고갱은 뒤늦게 입문하여 면치 못하다가 생을 비극적인 화가이다.
그가 화가로서 입지를 굳히는 데는 피사로의 영향이 컸다.
개인적으로 그는 인상주의풍의 작품을 상당히 보유했었으므로 그 출발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상주의의 미학적인 한계 즉 지나친 자연의 관찰 특히 광선을 쫓아간 분방한 색채가 "사고의 깊고 신비스러운 곳"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상주의와 다른 점이 드러난다.
그는 "단순한 색채를 강렬하게" 보여주면서 인상주의를 벗어난다.
그는 퐁와벤으로 경제적인 이유로 옮기고 거기서 베르나르라는 작가의 굵은 윤곽선의 새로운 양식을 보게된다. 스테인드 글라스와 비슷하게 분할된 면이 굵은 선으로 테두리 되어 클로와조니즘이라고 불렀는데 대담한 평면의 색면과 강한선은 고갱의 관심을 끌었다. 그 결실이 [설교후의 환상] (1888) 이다. 이 그림은 이와 같은 굵은 윤곽선으로 면면히 분할된 평면적인 공간이외에 고갱 예술의 실마리가 되는 상상, 신비, 사상이 나타난다. 그는 중간의 나무로 경계지어 붉은 색의 바탕이 상상세계를 중심으로 현실과 기도후의 환영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습관적인 재현세계를 떠나 신비롭고 환상적인 세계와 사실적 세계의 공존이 한데 어울어지고 있다.
이후 고갱은 보이는 세계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우월함을 주장하면서 점점 더 선과 색채의 추상점을 통한 신비스러운 내면세계를 표현하게 된다. 고갱의 조형세계를 특이한 취미를 반영하여 새로움을 추구한다.
인상주의로부터 비롯된 일본판화에서의 모티브와 평면적인 색채, 판화 자체의 흥미를 얻었고, 타히티 섬이나 그 이전의 어린 시절의 외국생활에서 비롯된 원시, 토속문화에의 관심으로 그가 주장한 관념의 조형화를 강렬한 형태와 색채의 종합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다분히 서구 문명의 우월적인 사관에 입각하여 문화를 응용할 뿐 그 문화자체의 완전한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제국주의적인 정치적 전략과 더불어 비롯되었다고 해도 원시미술에의 관심을 환기하고 이 후에 영향관계의 기원으로 보는데는 큰 의의가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의 세계를 확실히 믿었으며 그러한 신념은 [자화상]의 성격화된 이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새롭게 목판이 가진 참신함, 질박하고 투박한 각선으로 비롯된 겸손한 선과 형탤르 주목하여 인간의 본능적 감정이 표출된 듯한 이 파격적인 목판은 유럽의 전통적 구성에서 대담하게 벗어났을뿐 아니라 주제에서도 새로운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고갱은 문학의 상징주의 작가들과 공통점을 갖게 되는데 모두 미지의 세계의 속삭임에 관심을 가지면서 내면에 깊숙히 감추어진 인간 사고의 빗물질적이고 반자연적인 세계를 표현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상징주의 회화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는 말년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그의 사상의 집결체로서 오른쪽의 유년기 성숙기로 진행된다. 습작과정이 거의 없이 직접 캔버스위에 작업한 이 그림은 황금색과 푸른색으로 채색된 시간이 정지된 신비스런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갱의 작품들은 내면의 심리보다 자연자체를 주관적 시각으로 표현했으며 재현적 색채를 벗어나 상징적 색채를 사용하여 색자체의 자율성과 힘을 강조하였다. 마티스등 야수파에게 색의 힘은 영향을 끼쳤고 조형성보다는 감각, 상징적 내용에 치중하여 종합주의를 나타낸다.

1. 초기 (파리) 풍경화 주종 인상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2. 1888 클로와조니즘을 수용하여 과감한 탈바꿈을 시도 했으며 일본 판화에 심취했다. 습관적으로 그려왔던 재현적 세계에서 떠나 보이는 세계보다 작가의 상상력의 우월함을 표현하였다. 선과 색채의 추상성을 통한 신비스러운 내면세계 표현에 집중하였다. 신비스럽고 복잡한 관념의 세계를 단순하고 간결한 형태와 색채의 종합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 종합주의 : 원시미 술이나 민속예술의 독자성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과 연결시키기도 하였다.

3. 1891- 타히티 보다 근원적인 원시적 감성을 찾기위해 타히티로 떠나 타히티의 사람들의 넓적한 몸과 갈색피부, 토속신상이 등장하고 마돈나. 이브 같은 서구의 전통예술이 주제를 소재로 하는 작품을 그렸다. 여성과 자연을 동일시하는 표현을 많이 했으며 태피스트리 같이 표면을 장식적으로 엮어주는 색채표현을 하였다. 미신과 감정에 의해 행동하는 타히티 여인들의 표현에서 여성보다 자신이 합리적이고 우월하다는 유럽남성중심의 사고를 보인다고 지적 받기도 한다. *순수한 색채의 가능성과 표면의 장식성에서 새로운 미술의 방향을 이해했고 20C 미술의 모체가 되었다.


쇠라 Seurat, Georges Pierre (1859.12.2~1891.3.29)

신인상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1878년 파리의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H.레만의 지도를 받다가, 다음해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브레스트의 해안에서 병역을 마쳤다. 파리로 돌아와서는 고전 작품을 연구하고 소묘에 힘을 쏟는 한편, 셔브뢸, 헬름홀츠 등의 색채학과 광학이론을 연구하여, 81년경 들라크루아의 작품의 색채대비와 보색관계를 해명한 글을 발표하여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이러한 이론을 창작에 적용하여 점묘(點描)화법에 의한 최초의 대작 《아니에르에서의 물놀이:Une Baignade, Asni?es》(1883∼84)를 완성하였는데, 이 작품은 84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하였으나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일을 인연으로 평생 화우(畵友) P.시냐크와 사귀게 되었다. 85년 《그랑드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제작하여 다음해에 열린 인상파 최후의 전람회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전작(前作)의 수법을 한층 더 발전시켜 순수색의 분할과 그것의 색채대비에 의하여 신인상주의의 확립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이 밖에 《포즈를 취한 여인들:Les Poseuses》(88) 《기묘한 춤 Le Chahut》(89∼90) 《화장하는 여인》(90)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인상파의 색채원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고 인상파가 무시한 화면의 조형질서를 다시 구축한 점에서 매우 의의가 있으며, P.세잔과 더불어 20세기 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염성 후두염으로 32세의 젊은 나이에 파리에서 요절하였다.


뚤르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 Lautrec 1864 ~ 1901)

파리 몽마르트의 유명한 나이트 크럽인 물랭루즈를 그린 로트렉은 이 그림에서 대조적인 명암법, 전경과 후경의 도발적인 구성, 인물의 포즈, 소묘와 유채를 섞은 화법으로 드가의 인상주의 회화와 공통점을 가지고 잇다. 그는 상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인상주의자의 카페 장면이사의 것을 느끼게 한다.


루소 Rousseau, Henri (1844.5.21~1910.9.2)

프랑스의 화가. 마이엔현(縣)의 라발 출생. 가난한 함석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 때 지원병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악대에서 클라리넷 연주자로 근무, 4년 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가사 제대하여 파리에 정주하였다.
파리 세관에 세관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전기에는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은데, 선량한 일요화가로 알려져 르 두아니에(Le Douanier:세관원)란 애칭을 얻게 된 듯하다.
85년 살롱 드 샹젤리제에 2점의 작품을 출품한 것을 시초로 86년 이후는 앙데팡당전(展)에 거의 매년, 1905년부터는 3년에 걸쳐 계속 살롱 도톤에 출품하였다. 세관에는 1893년까지 24년간 2등서기로 근무한 듯하나, 퇴직 후에는 파리 변두리에서 바이올린·그림 등의 교수를 생업으로 삼으며 그림제작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은 사실과 환상을 교차시킨 독특한 것이어서 초기에는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그러나 1891년경부터 이국적인 정서를 주제로 다룬 《경악(驚愕:숲속의 폭풍)》(1891) 《잠자는 집시》(97) 《뱀을 부리는 여인》(1907) 《시인의 영감》(09) 등 창의에 넘치는 풍경화·인물화를 그렸다. 이들 작품에는 순진무구한 정신에 의해서 포착한 소박한 영상이 참신한 조형질서에 따라 감동적으로 나타나 있어, 현대의 원시적 예술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 하나의 전형(典型)을 엿볼 수 있다. 1905년경부터 피카소, 아폴리네르, 우데 등이 그의 작품에 주목하여 평가하기 시작하였으나, 그에 대한 실질적인 평가는 그의 사후에 이루어졌다.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