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의 소설작법 강의
1.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2.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3. 왜 글을 쓰는가?
4. 무엇을 가지고 쓰는가?
5. 어떻게 써 나갈 것인가?
6. 배경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7. 인물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8. 대화는 어떻게 써야하는가?
9.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0. 문장을 쓰는 요령은 무엇인가?
1.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가?
청소년 문학 강좌를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나 같은 작가가 다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고사했지만, 1년 반 동안 청소년들의 소설을 살펴보았으니 그 안에서 느낀 문제를 풀어나가 보라는 권유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긴 하겠지만 이야기는 주로 “소설”에 한정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년 반 동안 보아온 것이 바로 청소년 여러분의 소설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 회에서는 글이란 무엇인지,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고 가겠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는 누구를 위해서 글을 쓰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제목에 달아놓은 것처럼 말이죠.
글은 누군가를 대상으로 쓰게 됩니다. 내가 <글틴>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 글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누구를 대상으로 그 글을 쓰는지를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편지를 쓴다면 그 대상이 누군지 분명히 알고 있겠지요? 글쓰기란 편지쓰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글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기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만 보여주기 위해 쓰는 특수한 글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는 글은 창작물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기록이 목적인 일기에 대해서는 깊은 논의를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일기도 깊이 들어가 보면 자기 자신과의 대화와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결국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글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 때문에 독자를 자기 자신으로 한정하고 쓴 일기도 보편적인 문학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나 「난중일기」같은 것을 생각해 보세요.)
다시 말해보죠. 글을 쓴다는 것, 즉 창작을 한다는 것은 이미 누군가를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보편적인 인류라면 그것은 일반 문학이 될 것입니다. 그 대상이 10대 미만의 아동이라면 아동문학이 될 것이고, 십대라면 청소년 문학이, 미스터리 애호가라면 추리소설이, 용과 마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판타지 소설이 될 것입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글, 내가 전하고 싶은 글
그럼 누군가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바라는 글을 쓴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그 대상에게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논술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작금 대한민국 청소년의 최대 관심사는 논술이잖아요. 자자, 물론 나는 아니라고 할 친구도 있겠지만 (글 쓰는 친구들 중에는 괴팍한 사람이 워낙 많지요.) 딴지걸지 말고 쫓아와 주세요.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대입 전선에 서서 논술 시험을 치게 된다고 해봅시다. 주어진 문제를 읽고 그에 대한 의견을 써나가기 시작합니다. 누구를 대상으로 쓸 것입니까? 즉, 누구에게 설명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글을 써나갈는지요? 어떤 이들은 출제자를 위해서 글을 써나갑니다. 출제자가 왜 이런 문제를 냈을까 궁리해 본 뒤 깜냥이 서면 글을 쓰기 시작하죠. 글을 보게 될 대상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이 안에는 사실상 자기 자신의 의견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의견보다 출제자의 비위를 맞춘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람직한 논술이란 물론 자기 자신의 의견을 일반인을 상대로 전개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솔직하게 말해서 어느 쪽이 대학입학시험에 유리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논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대학교 측 이야기를 들어보면 종종 출제자의 의도를 읽어야 한다는 식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이야기대로 대입 논술을 썼다가 미끄러졌어요, 라고 따지러 오진 마세요.)
어떤 독자에게 내 글을 전할까
소설을 쓰거나, 시를 지을 때도 똑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글을 읽는 이들이 누구라고 생각하고 글을 써왔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시를 읽고 내가 느낀 감동을 같이 느낄 수 있는 사람이요.”
다른 친구는 이런 말을 하는군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은 없지만, 꼭 그런 생각을 해야만 시를 쓸 수 있나요? 시는 자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잖아요.”
두 말은 사실 같은 말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시를 쓰는 사람들은 그 대상을 일반인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일반인이라는 것이 자기만큼의 수준을 가진 사람들로 한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즉, 자기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자동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네,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바둑을 예로 들어볼까요? 바둑 7, 8급 정도 되면 서서히 정석 책을 사서 읽어보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프로 기사들이 두는 바둑의 뜻을 읽어낼 수가 없습니다. 아직 살지 못한 돌이 남아 있는데, 엉뚱한 곳에 두는가 하면 그 기회에 돌을 살려야 할 텐데 중요해 보이지 않는 곳에 착점합니다. 답답할 정도입니다. 프로 기사들이니까 뭔가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두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시나 소설에도 이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대상을 마음에 그리지 않고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만 치중하게 되면 사람들이 동감하기 어려운 이해할 수 없는 글이 나올 수 있습니다. 작가 자신만 알고 전달되지 않으며, 작가의 정신세계에서만 이해 가능하고 남에게 호환되지 않는 글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작가와 동일한 경험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글로부터 동의도, 교훈도, 어떤 감동도 끌어낼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들을 한없이 낮은 수준으로 잡게 되면 글이 천박해지고 맙니다. 그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가가 작가의 끝없는 고민이 됩니다.
한정된 독자를 위한 글
작가 자신의 수준이 어디인가, 그리고 글을 읽는 독자의 수준이 어디쯤 와 있는가라는 문제는 규정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계속 글을 써나가면서 상호 피드백을 통해 깨우쳐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독자를 자기 자신과 유사한 수준으로 규정하고 그 수준의 글쓰기를 한다면 글이 점점 어려워질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글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대상을 분명히 한정해 놓고 있는 글들은 정의를 내리기가 좀 쉽습니다. 이른바 장르 소설이라 부르는 것이나,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글들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정의하기 쉽다고 해서 그런 글이 더 쓰기 쉽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령 추리소설에서는 “더 이상의 밀실 트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죠. 하지만 추리소설에서는 오늘날에도 매력적인 밀실 살인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때 그 밀실 살인이 기존 추리소설을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면 명작으로 남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다면 그렇고 그런 삼류 소설로 전락하게 되겠지요.
동화의 경우는 어떨까요? 어린이들이 읽는 동화에 잔혹한 고문이나 살인, 방화 등의 범죄를 상세하게 묘사해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작가가 어린이에게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주로 충성, 효도, 예의범절 같은 것들)을 주워 모아서 동화를 쓰는 것 역시 매우 부적절합니다. 그런 생각은 작가가 보는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필요한 것들일 뿐이죠. 이래서 동화를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입니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니까 적당히 넘어가도 괜찮을 거야”라는 식으로 생각하면 큰코다치게 됩니다.
이런 점을 피해가고 싶은 작가들은 종종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는 말로 자기 책을 포장합니다. 이 말이 나타내는 것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동화를 쓰는 것보다 어른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쉽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대상 없는 글쓰기가 있을까
“우와, 누군가를 대상으로 잡아서 글을 쓴다고 해도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그렇습니다. 글쓰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은 잘하지만 글로 무엇을 쓰라고 하면 어려워합니다. 아무리 말하듯이 써보라고 해도 쩔쩔매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글쓰기 훈련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앗, 예상하고는 다른 대답이 나왔나요? 글쓰기 훈련이란 무엇
일까요?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대상을 정확히 설정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입니다. 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눈앞에 분명한 대상이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이를 앞에 놓고(또는 컴퓨터 키보드를 앞에 놓고 있으면) 말해야 할 대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막연한 것이죠. 그래서 무엇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당연히 어렵죠.
누군가를 대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올바른 글쓰기를 위해 필요한 것인지 이해들 하셨나요?
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들은 누구를 대상으로 글을 쓰고 그것을 <글틴>에 올리고 있었나요?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냥 막연하게 내 글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글을 쓴 친구들도 있을 것이고, 확실한 대상을 상정하고 글을 쓴 친구들도 있을 것입니다. 막연한 대상을 상대로 글을 쓰는 친구들이라 해서 대상이 없는 글쓰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기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을 대상으로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이 비평가의 입맛에 맞춰 글을 쓰는 것보다 백번 낫습니다.
그것은 시든 소설이든 어떤 특정인물 한두 사람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과 교감하기 위해 쓰는 것이기 때문이죠. 좋은 글일수록 많은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글을 심사할 사람을 위한 글을 쓴다거나, 비평가의 구미에 맞는 글쓰기를 한다는 것은 논술시험에서 출제자의 의도에 맞는 글쓰기를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글은 그 자체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게 해주지요.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글이 아닙니다. 왜냐고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가 봅시다.
2.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발상은 어디서 오는가?
소설가들이 인터뷰를 할 때 자주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소설의 스토리는 대체 무엇을 계기로 떠오르는 걸까요?
자, 답을 읽기 전에 잠깐 생각을 해보세요. 사실 소설뿐 아니라 모든 문학에서의 발상은 동일한 곳에서 출발합니다. 무엇일까요? 여러분 자신이 글을 쓸 때 어디서 발상을 가져왔는지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어느 순간 무언가가 마음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라고요? 맞아요. 그게 정답입니다. 앗, 갑자기 여러분의 한숨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게 아니라 그 무언가가 어떻게 떠올랐는지가 궁금하다고요?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이 해답은 너무나 유명해서 질문하는 순간 답이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글을 잘 쓰는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입니다. 이 중에 “많이 읽고”가 이번 강의에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많이 읽지 않으면 발상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를 포함한 작가들은 모든 것에서 발상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서 말이죠. 아래 시를 한번 볼까요?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황지우 시인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의 한 부분입니다. 이 시에서 발자국과 나뭇잎은 그냥 찍혀져 있는 것이 아니며, 그냥 바스락거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쳐버린 발자국과 나뭇잎이 시인의 눈에 걸리자 기다림의 의미를 가진 시어가 됐습니다. 그야말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그냥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훈련”에 의해서만 가능해집니다. 그 “훈련”의 시작이 바로 “많이 읽기”입니다.
사물의 연관성을 깨달아라
미국의 유명한 추리소설가 존 D 맥도널드(영화 [케이프 피어]의 원작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물의 연관성을 깨닫고 ‘아하’ 하고 생각했을 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법이다.”
발자국과 나뭇잎에서 기다림의 연관성을 깨달으면 좋은 시가 나옵니다. 그런데 정말 많이 읽으면 이런 능력이 생기냐고요? 아닙니다.
금방 한 말과 다르다고요? 화내지 말고 조금 더 읽어봅시다. 훈련을 하면 42.195킬로미터를 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곧장 마라톤 선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라톤 선수는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단은 42.195킬로미터를 뛰어야 되는 것이니 그 부분부터 이야기하고 갑시다.
많이 읽는다는 것은 지식을 늘리는 행위입니다. 지식이 풍부하지 못하면 사물의 연관성을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지식이 풍부하지 못한 사람도 한두 편의 좋은 시나 좋은 소설을 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쓸 수 없죠. 한두 편에 밑천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밑천이 드러난 작가만큼 비참한 작가는 없습니다. 그런 작가들은 자기복제를 하면서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게 되죠. 그런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많은 양의 책을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분야의 책만 읽는다면 한 분야의 글밖에는 쓸 수 없게 됩니다. 기초 체력을 길러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지식의 폭이 넓어지면 그만큼 사물의 연관성을 더 많이, 더 뛰어나게 연결지어나갈 수 있습니다. “많이 읽기”는 이외에도 글쓰기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지만 그 부분은 이번 강의와는 관련이 적으니 넘어갑시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전문적인 훈련이란 무엇일까요?
관찰력을 길러라
60년이나 추리소설을 쓴 여류작가 미뇬 G. 에버하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개의 작가는 타고날 때부터 관찰의 재주가 있다고 생각한다. 압지처럼 무엇이든지 빨아들이는 것이다. 다만 한 친구가 언젠가 말한 것처럼 ‘넓고 얕게 알고 있을 뿐’이기는 하지만.”
넓고 얕게 알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일단 발상이 되면 그 다음에 조사를 통해 전문적인 부분은 얼마든지 보강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이 읽음으로써 지식의 폭이 넓어지면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지식의 사과가 아담과 이브에게 부끄러움을 알게 한 것처럼, 지식은 지금까지 여러분이 몰랐던 것을 알게 해 줍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심히 보이는 늘 같은 풍경이 작가에게는 전혀 다른 각도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나는 최근에 짤막한 동화 한 편을 썼는데, 그것은 [마비노기]라는 온라인 게임 속의 한 장면 때문에 쓰게 된 것입니다.
그 게임에는 ‘던바튼’이라는 도시가 있는데, 이 도시로 가는 남쪽 길에는 사과나무 하나가 길 복판에 세워져 있습니다. 길이라는 곳에는 본래 사과나무 같은 것이 자랄 수 없는 법입니다. “왜 길 한복판에 사과나무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해답을 찾아야만 했지요. 그것이 한 편의 동화로 마무리된 것입니다.
내가 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도 발상은 조카와 작은딸이 주고받는 말에서 왔습니다.
“검정색을 만드는 건 진짜 쉬워. 모든 물감을 다 뒤섞으면 되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물감을 섞으면 검정색이 되지만, 빛의 색을 섞으면 흰색이 되는 걸”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고, 이것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이런 작은 것들, 일상생활의 모든 것에서부터 발상이 나옵니다.
그럼 많이 읽기가 관찰력을 증대시킬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이번에도 맥도널드의 말을 들어보죠.
“작가라는 것은 갖가지 사물에 대해서 취사선택 없이 기억한다. 10년 전에 들었던 자동차 지붕에 떨어지는 우박소리가 오늘 본 빈 휠체어를 미는 어린이 모습과 겹쳐서 그것을 어떻게 관련시킬 것인가가 머리에 떠오르면, 거기서 심각한 장편 소설도, 트릭 중심의 단편 소설도 만들어낼 수 있다.”
작가들은 이미 이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글 속에는 이런 관계가 수없이 숨겨져 있습니다.
“뭐라고요? [마비노기] 게임에서 동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에요?”라고 묻지는 마세요. 거기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길 한복판의 사과나무”라는 설정에서 이런 동화가 나왔구나, 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우리가 신이 아닌 다음에야 무의식의 세계에서 떠오른 부분까지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런 관계를 풍부하게 파악해낼수록 여러분은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간 것이 됩니다.
앞에 나온 황지우 시인의 시 같은 경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며 그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다른 시인이 써먹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사물의 관계를 파악해나가는 방법을 알게 됩니다. 스티븐 킹은 이렇게 말합니다.
“독서가 정말 중요한 까닭은 우리가 독서를 통하여 창작의 과정에 친숙해지고 또한 그 과정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사람은 작가의 나라에 입국하는 각종 서류와 증명서를 갖추는 셈이다.”
정말 옳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설렁설렁 글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관찰력은 여기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작품과 또 다른 사람의 글을 읽어라. 다만 집중해서 꼼꼼하게 읽어야 한다. 그들이 배움터가 되어줄 것이다. 그 작가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지 관찰하고 왜 그렇게 쓰는지 생각해보려고 노력하라. 다른 사람의 설명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 깨달을 때만 자신의 일부로 체득하게 된다.”
발상은 중요하지 않다?
발상은 중요하지만 또한 중요하지 않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발상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글이 되기도 합니다. 발상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글은 쓰다 보면 스스로 발전하기도 하니까요. 처음 발상과는 다른 글이 되었다고 그 글을 내다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발상만 버리세요. 발상은 이야기를 꾸며내는 촉매 역할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마비노기] 게임은 내 동화에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촉매 역할로 끝이죠. 루이스 스티븐스가 [보물섬] 서문에 “지도에 낙서를 하다가 주인공들이 떠올라 이 소설을 썼다.”라고 밝히지 않았다면 아무도 “지도”가 [보물섬]의 발상이었다는 것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상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하죠. 많이 읽고 좋은 관찰력을 가지는 것이 발상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많이 읽고 좋은 관찰력만 가지면 발상이 떠오를까요? 아닙니다.
“아니, 이 양반이 지금 누구 약 올리나?”라고 하지는 마세요. 이게 제일 중요한 이야기니까요.
파스퇴르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우연은 기다리는 자에게만 온다.”
흉내를 내서 미안하지만 발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발상은 기다리는 자에게만 온다.”
쓰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발상이 나올 리가 없죠. 무슨 글을 쓸 것인가, 무엇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것인가가 없다면 발상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데 발상이 나온다 한들 어쩌겠습니까?
작가들 중에는 “이러이러한 발상이 떠올라서 이 글을 썼습니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 발상이 먼저고 글은 나중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착각하면 안 됩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이미 작가인 사람입니다. 작가는 다른 사람에게 할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할 말이 없는 사람은 어떤 좋은 발상을 한다 해도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할 말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다음 강의에서는 바로 그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3. 왜 글을 쓰는가?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
많은 작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문학은 내 존재 이유의 모든 것이다. (옌롄커(閻連科))
멋진 말이긴 한데, 그것이 어떤 경지인지는 좀 아리송합니다. 작가는 글을 왜 쓰는 걸까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이런 말은 어때요?
그렇다면 도대체 왜 글을 쓰는가? ... 나는 작가의 불행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그 가운데 어딘가에는 행복도 있다. 어디에 있는지, 무엇 때문인지는 설명할 수 없지만, 행복이 있긴 틀림없이 있다. 그 행복감을 알고 느끼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는 한 글쓰기를 계속할 것이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하고 자리를 바꾸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다.
시나리오 작가 레슬리 딕슨은 훨씬 간결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쓰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 아니겠어?
글을 쓰는 행위는 창조 행위입니다. 작가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합니다. 그 세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계는 작가의 내면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안에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끄집어낼 때 작가는 행복감을 느낍니다. 물론 그것이 잘 나오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죠. 이야기를 많이 만들어낼 수 있는 작가는 그렇지 못한 작가보다 행복할까요? 나는 그 절대적 가치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꺼내야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죠. 작가 윤대녕의 다음과 같은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가슴이 뛰어야 서사가 나오는 겁니다. 가슴 뜀은 에너지이고 모든 예술의 원천이죠. 연애 감정이 대표적인데, 꼭 그것이 아니더라도 가슴 뛰는 그 무엇이 없다면 작가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 황홀함을 겪은 뒤에 작품이 나오는 것 같아요.”
자신 속에서 감동을 느끼고 내면화되지 않은 작품은 세상에 나와야 빛을 보기 어렵죠. 어떤 공상적인 글이라 할지라도 그 속은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내 책에 쓰인 것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없다” (마르케스)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을 비롯하여 마르케스가 쓴 소설은 매우 환상적인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설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요즘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이 정의가 실려 있는지 모르겠어요.
소설이란 있을 수 있는 허구다.
그때 나는 카프카의 <변신>(1916)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위의 정의는 맞지 않는다고 질문을 했죠. 국어 선생님은 “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는,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지금의 나는 국어 선생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작가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말이죠. 무협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장풍과 내가기공의 세계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은 무협소설을 읽지 못합니다. 이런 것은 소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수사 드라마인 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CSI의 세계관을 받아들입니다. 몇 시간이면 유전자 분석이 끝나고, 픽셀을 확대해도 깨지지 않는 놀라운 디지털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드라마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위로하는 글쓰기
작품을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작가만이 아닙니다. 독자가 작품을 작품으로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와 독자가 함께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스티븐 킹의 말을 들어볼까요?
글쓰기란 무엇인가? 물론 정신 감응이다.
우리는 작품을 통해 수천 년 전의 작가와도 정신적인 감응을 할 수 있습니다. 수천 년, 수백 년 전의 작가들이 했던 말에 아직도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이죠. 대체 그들이 남긴 무엇에 대해서 우리는 공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어떤 보편타당한 주제? 충성과 효도, 명예와 존경, 영광과 헌신? 그런 것들일까요?
물론 이런 주제는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이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문학 작품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이런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 주제는 무엇일까요? 샤갈의 ‘나와 마을’에서 우리는 어떤 보편타당한 주제를 찾아낼 수 있을까요? 아니면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어떤가요?
범주가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작가 박민규의 다음 말을 한번 들어봅시다.
전 제 자신도 불쌍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전체적으로 불쌍해요. 돌아보면 나 자신도 가엾 은 인간이고 누구나 다 그래요. 그래서 하나 바람이 있다면 많이 위로해주고 싶어요. 어디 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데 어쨌거나 와서 같이 살고 있잖아요. 다른 재주를 지닌 양반들이 만든 옷을 내가 입고, 만들어준 전화기를 사용하듯이 저는 글쓰는 재주가 있으니 많이 위로해주고 가고 싶어요.
위로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높은 정신적 고양을 주는 위로가 있을 수 있을 것이며, 통쾌한 액션을 통해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위로도 있을 수 있는 것이죠. 지적인 위로가 있는가 하면 감정적인 위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푸코의 진자>(1988)나 <장미의 이름>(1980) 같은 소설은 매우 지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움베르토 에코를 대중소설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코는 미키 스필레인 같은 추리소설작가, <007 시리즈>를 쓴 이언 플레밍 같은 대중소설가의 작품을 인용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이들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요? 잠깐 생각해 보았나요? 그럼 쿤츠의 다음 이야기를 잘 읽어보기 바랍니다.
자기 자신의 기쁨을 위해 글을 쓰는 사람은(항상 그래야 하겠지만) 한 개인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쓰고 있는 셈이고, 독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글을 쓰는 사람은 다수의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쓰고 있는 셈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글을 쓰는 사람은 출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애꿎은 나무들을 죽여가면서 남들에게 읽히지 않을 수천 권의 글을 쓴다는 것은 엄청난 이기주의라 하겠습니다. 함민복 시인의 시 한편을 읽어볼까요?
긍정적인 밥
시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독자와 소통하는 세계
그렇다면 작가는 독자를 위로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란 말일까요?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복잡하고 방대해서 수천 권의 책을 내도 다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매우 거친 방법이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해버릴 수밖에 없겠네요.
작가는 작가의 세계를 독자들과 같이 향유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글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심지어 <해리 포터 시리즈>는 영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상황에서도 국내 출판사들로부터 퇴짜를 맞았답니다. 국내 주요 일간지에서는 판타지 소설에 불과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낼 수 없다는 말까지 했었죠.
작가 현길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설을 쓰는 일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탐구다.
작가는 전지전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작가 역시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죠. 따라서 시대적 한계를 초월하는 작가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작가란 그 시대의 문제를 독자와 공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시대의 문제가 인류의 보편타당한 문제와 맞닿아 있을 때, 그 작가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해서 살아남는 명작이 될 것입니다. 주의해서 읽으세요. 이 말은 결코 무겁고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이 무겁고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마크 트웨인의 작품이 무겁고 거창한 주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이 아닙니다.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 그 탐구에 대한 결론은 사람마다 다른 것입니다.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이끌어내게 될지는 전적으로 작가에게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티끌처럼 가벼운 것일 수도, 태산처럼 무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보편타당한 것일 수도,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이해될 수 있는 특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평가는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에게 맡겨지는 것이죠.
또 하나 꼭 명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작가는 도덕 선생님이 아닙니다. 독자를 가르치고자 하지 마세요. 자신의 세계로 독자들을 끌어들여 그 세계를 함께 누리도록 만들면 작가의 일은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라고 자신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작가는 새로운 세계의 인도자일 뿐입니다. 그 세계 안에서 작가의 주제를 찾아내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물론 작가와 독자 사이에 교감이 잘 이루어져 작가의 뜻이 온전히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그리고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겠죠.
4. 무엇을 가지고 쓰는가?
소재란 무엇인가?
주제는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입니다. 그 이상을 손에 잡히는 질감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바로 소재입니다. 작가는 소재를 가지고 글을 씁니다. 구체적인 형상은 소재를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죠.
소재와 주제는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 개의 사과가 있을 때, 사과의 맛이 주제라면 사과의 색은 소재라 할 수 있죠. 그것들은 때로는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는 주제와 일대일 대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재는 여러 가지가 동원될 수 있습니다. 그 소재들은 주제와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게 마련이죠. 소재가 주제와 관계를 맺지 않으면요? 그런 소설을 잘못 쓴 소설이라고 부릅니다.
소재는 주제와 맺는 관계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그 때문에 같은 소재로 쓰인 소설이라도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무자비하고 몰인간적인 속성에 희생당하는 노동자를 소재로 글을 써도 이문열(1948~) 작가는 <알 수 없는 일들>(2001)처럼 허물어지는 인간을 묘사해내고, 고리키(1868~1936)는 <어머니>(1907)처럼 혁명을 부르짖는 인간을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소재 자체는 객관적 실체이지만 작가가 그 소재를 받아들일 때 그것은 객관적 실체를 넘어서서 작가의 심상 속에서 생명을 부여받은 새로운 객체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주제가 발생하며, 주제를 소재 속에 녹여서 서술해 나갈 때 작품이 완성됩니다.
작가에게 있어, “소재가 먼저냐, 주제가 먼저냐”를 따지는 것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도 제일 먼저 존재하는 것은 작가의 쓰고자 하는 욕망이라 해야 하겠지요. 이러한 과정을 기계적으로 나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창작은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의식은 단계별로 쪼갤 만큼 단순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일제강점기에 농촌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발표한 이무영(1908~1960)을 생각해 봅시다.
이무영의 훌륭한 점은 농촌을 피상적인 목가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농촌의 실생활 속으로 파고들어간 뒤 농촌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지적하고 그를 통해서 농촌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그의 소설은 소재와 주제가 밀접한 연관 아래 놓여 있는데, 그가 소재를 먼저 발견한 것일까요? 아니면 주제를 먼저 찾은 뒤 소재를 찾아 떠난 것일까요?
소재로부터 주제가 발생하기도 하고, 주제로부터 적절한 소재들이 발굴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쓰고자 하는 욕구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말했던 것처럼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 정신”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재건 주제건 잡아낼 수 없게 됩니다.
참신한 소재를 찾아라
소설의 소재는 참신한 것일수록 좋습니다. 왜냐하면 남들이 이미 다 다룬 소재는 남들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가령 임꺽정을 소재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해보죠.
임꺽정을 소재로 다루려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임꺽정이 활약한 명종 시대의 사회상을 파악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백정의 삶에 대한 자료를 찾아내는 것일까요? 지금은 가볼 수 없는 황해도 구월산의 지형 지리를 알아내는 것일까요? 모두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조선의 3대 천재라 불린 홍명희(1888~1968)의 <임거정>(1928~1939)을 뛰어넘는 소설을 써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임꺽정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는 사실 이 소설을 통해서 구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홍명희가 임꺽정을 소재로 택하면서 대중의 인식을 차용해 나간 부분도 많습니다. 소설과 기존 인식이 상호작용하면서 임꺽정은 거침없는 천하장사 호걸이라는 이미지를 굳혔습니다.
이런 인식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효서(1958~) 작가는 정반대의 틀을 가지고 접근하여 <악당 임꺽정>(2000)이라는 소설을 쓴 것이고, 조해일(1941~) 작가는 임꺽정의 비인간적인 영웅 이미지를 덜어내어 훨씬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한 <임꺽정에 관한 일곱 가지 이야기>(1986)라는 단편집을 냈던 것입니다.
이렇듯 잘 알려진, 그리고 많이 다뤄진 소재를 가지고 새로운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 됩니다. 굳이 이렇게 어려운 길을 택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자신이 기존 작품의 해석보다 월등한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도전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새로운 소재를 찾으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겠네요?”라고 어떤 순진한 친구가 물어오더군요. 새로운 소재란 444번 원소와 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학창 생활이라는 소재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도 서너 가지의 소설을 머리에 떠올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보편적인 소재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서 다뤄졌지만, 오늘날에도 계속 다뤄지고 있으며, 미래에도 끊임없이 다뤄질 것입니다. 그것은 이 소재를 주제에 의해서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문제와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미술 작품에 비유해서 생각해 봅시다. 미켈란젤로는 벽화를 그리기 위해 여러 가지 재료를 골라보았습니다. 독특한 질감과 색을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각을 위해서는 가장 보편적인 재료인 대리석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여서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선보일 때, 그 소재는 새로운 것으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단순한 대리석으로 환원해 보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죠.
소재를 파고들어라
소재를 찾아냈다고 그것을 날로 먹어치울 수는 없습니다. 기발한 소재를 찾아냈다고 해도 그것이 바로 소설이 되지는 않습니다.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내 학창 시절에 다니던 버스에는 안내양이 있었습니다. 내릴 역을 안내하고, 버스 문을 개폐하며, 버스 요금을 징수하는, 지금은 기계가 하는 일을 모두 하던 사람들이 바로 안내양이었습니다. 안내양들은 시스템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어느 날 직장을 잃게 된 가난한 안내양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혈기왕성한 대학생이었던 나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그 느낌을 시로 뽑아냈습니다. 시는 이렇게 소재를 접하는 순간의 감정의 변화와 기복만으로도 써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문제가 다릅니다. 만일 저 문제를 소설로 쓰고자 했다면, 첫째로 안내양의 생활을 알아야 합니다. 안내양의 근무 환경, 그곳에서 쫓겨났을 때의 생활 방편,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없었던 환경 등등도 알아내야 하겠지요. 또한 버스 산업이 왜 안내양을 필요치 않게 되었는지, 그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하여 그 사건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하는가라는 주제 의식까지 이 소재를 밀고나가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잘 알아보지 않고 상상에 의지해서 글을 쓰게 되면 반드시 잘못된 부분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소설은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부여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SF를 쓰는데, 가령 이런 문장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우리는 토성으로 가는 행로에 드디어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진입 순간 우주선은 부드럽게 덜컹거렸다. 마치 우리의 무사 귀환을 같이 기뻐하는 것만 같았다.
위와 같은 문장은 완전히 엉터리입니다. 우주에는 공기가 없기 때문에 진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과학 지식이 있는 독자가 볼 때면 코웃음을 치고, 책을 던져버리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이런 문장이 붙는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요.
헨리는 뭔가 문제가 생긴 것을 알아차렸다. 진공 상태의 우주를 항해하는 우주선이 흔들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헨리는 기관실로 통하는 통신 버튼을 눌러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자 했다.
소재를 확실히 녹이지 못한다면 소재는 역으로 주제를 죽이는 독소가 될 뿐입니다. 따라서 작가는 되도록이면 자신의 실제 경험에 가까운 체험을 소재로 삼으려고 하게 마련입니다. 실수의 위험이 매우 적기 때문이죠. 또한 평소에 많은 관찰과 공부를 통해 사물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남자라 할지라도 현대를 배경으로 연애 소설을 쓰겠다면, 여자들의 화장품과 화장법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직장에서 돌아온 여주인공이 피곤한 나머지 화장을 지우지 못하고 잠들었을 때 아침에 깨어나 후회하는 장면을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죠.
소재와 주제의 앙상블
소재는 소재일 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소재에 얽매여 주제를 망각하면 곤란해집니다. 기껏 소재를 파고들었는데, 소설에서 안 써먹으면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소설은 하나의 거대한 자료집처럼 보입니다. 자기가 취재하고 조사하여 알아낸 사실들을 빼곡하게 적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 결과는 설정집으로서의 가치만 지닌 소설이 될 뿐입니다.
나는 주로 역사소설을 썼는데, 역사소설은 그 배경을 역사적 사실에 두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백한 사실을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것이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 <트로이>를 보면 아킬레스가 죽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신화에서 아킬레스는 지옥의 강에 담겨졌기 때문에 여신인 어머니가 손으로 잡았던 발꿈치 이외에는 도검불침(刀劍不侵-칼과 검으로도 공격할 수 없을 만큼 강인함-편집자주)의 몸이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파리스는 바로 그 유명한 아킬레스 건을 쏘아서 그를 죽입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아킬레스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나옵니다. 파리스는 그의 몸에 여러 벌의 화살을 쏘아 그를 죽이죠. 그런데 아킬레스가 죽는 순간 아킬레스는 자기 몸에 뽑힌 화살들을 모두 뽑아버립니다. 발뒤꿈치에 꽂힌 화살은 미처 뽑지 못하고 죽지요. 감독은 “신화란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 <트로이>는 아주 잘 알려진 신화를 소재로 삼았지만, 그 신화 그대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습니다. 주제에 따라 소재를 변용하고 있지요.
소재는 주제에 의해 재단되어지고 결합되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소재와 주제가 융합되어 함께 빛날 수 있습니다
5. 어떻게 써 나갈 것인가?
스토리와 플롯에 대하여
이제 주제도 잡았고, 그에 걸맞는 소재도 찾았습니다. 그럼 정작 써나갈 일만 남은 셈. 그럼 한번 써보죠. 쓸 수 있는 도구를 준비합시다. 종이와 펜? 모니터와 키보드? 아무 거나 상관없습니다. 이것들은 그저 도구일 뿐이니까요.
그런데 뭘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요? 도대체 어떻게 시작해야 하냐고요?
자,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아직 세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고요?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이 세계를 만드는 데 6일이나 걸렸으니, 우리도 적잖은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이야기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투덜대는군요.
“앗,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는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건데, 이야기를 준비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요?”
그렇긴 하군요. 그럼 구분을 좀 해보죠. 영국의 소설가 포스터(E.M. Forster 1879~1970)는 스토리와 플롯이라는 말로 이 두 가지를 구분합니다. 우리도 혼동되는 ‘이야기’라는 말을 스토리로 바꿔 봅시다.
스토리란 무엇일까요? 쉬운 말로 ‘줄거리’입니다. 시간 순으로 서술한 줄거리를 스토리라고 합니다. 줄거리에 동기(모티브) 부여가 이루어지면 그것은 플롯이 됩니다. 플롯은 흔히 우리말로 ‘구성’이라고 옮깁니다.
가령 소설 작법 시간에는 “여자와 남자가 등장하는 줄거리를 구성하라”라는 과제를 줄 수도 있죠. 그러면 “여자가 남자에게 살해당했다”는 초간단한 줄거리를 세워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여자가 살해당한 거죠? 남자가 미친 것은 아닐까요? 아닙니다. 남자는 여자의 재산을 노렸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남자가 여자를 죽인 동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자, 이처럼 스토리에 동기를 부여하여 새롭게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을 플롯이라 부릅니다. 아직도 스토리와 플롯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고요? 추리소설을 예로 설명해봅시다.
(1) 탐정사무실에 한 사람이 찾아와 사건을 의뢰합니다. 한 여자의 살인범을 찾아달라는 의뢰입니다.
(2) 탐정은 조수와 함께 사건을 조사합니다. 여자의 전날 행적을 추적합니다.
(3) 여자가 만났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그 사람들의 한 달 전 행적도 조사합니다.
(4) 사건의 윤곽이 파악되는가 했더니, 누군가가 의뢰인을 납치합니다.
(5) 의뢰인을 납치한 사람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납치는 자작극이었군요.
(6) 의뢰인이 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의뢰인의 행적과 동기가 밝혀집니다.
그럴듯한 추리소설입니다. 그런데 시간 순으로 배열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저 사건이 시간 순으로 배열된다면, “(3) 사건 한 달 전 이야기 - (2) 사건 전날 이야기 - (6) 사건 당일 이야기 - (1) 조사 의뢰 - (4) 납치 사건 발생 - (5) 범인 체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열된다면 범죄소설은 될 수 있어도 추리소설은 되지 않겠지요. 스토리는 시간 순서에 따른 사건의 배열을, 플롯은 인과 관계에 따른 사건의 재구성을 의미합니다.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쓰겠습니다.)
스토리는 그 일 다음에 무슨 일이 생겼는가를 묻지만(여자가 살해당했대. 그래서?), 플롯은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묻기 때문이죠(여자가 살해당했대? 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
플롯의 3대 요소로 인물(Character), 사건(Acting), 배경(Setting)을 꼽습니다.
인물은 개성을 부여받아서 행동하는 무엇을 가리킵니다. ‘무엇’이라고 하는 이유는 ‘인물’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로봇일 수도 있고, 개미일 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습니다. 일례로 잔인한 아버지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가 잔인한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어려서 그 자신도 아버지에게 학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그에게 한 번도 관용을 베풀어 준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배를 곯아온 그는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건은 ‘인물’의 행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상황을 나타냅니다. 인물의 모든 것은 ‘사건’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그는 잔인한 사람이었다, 라고 쓸 수도 있습니다만,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몽둥이를 들어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패기 시작했다, 라고 쓴다면 그가 매우 잔인한 사람이라는 것을 독자는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사건을 통해 인물을 나타내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들을 왜 팼냐고요? 그런 의문을 갖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을 적어나가면서 플롯을 완성하게 됩니다.
배경은 ‘인물’이 ‘사건’을 겪는 시간적, 공간적 공간을 의미합니다. 자기 아들을 무지막지하게 패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17세기의 유럽 정도로 설정을 가져가 봅시다. 인권의식이 막 발동하고 있는 때입니다. 따라서 배경에 맞게 매맞는 아들을 지켜줄 조력자가 등장해도 괜찮겠습니다.
이렇게 긴밀하게 관계하는 것들을 모아서 생각을 발전시킵니다.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앞서서 주제와 소재에 대해서 공부해봤는데, 플롯 또한 이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이것들은 어느 것이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이 작가의 머리 속에서 복잡하게 얽혀 있게 마련입니다. 주제, 소재와 플롯을 엮어나가는 것은 상상력입니다.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이 없다면 소설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상상과 망상은 구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생각이 상상이라면, 혼자만 흡족해하는 생각은 망상입니다.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는 글을 무한히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마구 써제낀다면, 그것은 망상의 기록일 뿐,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다.
좋은 플롯은 그래서 독자들을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일이 일어날 만한 동기를 보여주어야 하는 거죠.
너무 친절했던 사람이 갑자기 표독스런 행동을 한다면, 그에 걸맞는 이유가 준비되어야 한다는 거죠. 가령 암에 걸려서 애인에게 정을 떼고 이별을 고하려는 방법으로 갑자기 표독스러워진다는 식의 이유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암에 걸린 남자가 지극히 이기적이고, 평소 자기 자신밖에 몰랐던 사람이라면 갑자기 여자를 배려한다는 설정은 개연성이 없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때도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생을 돌아보고 반성한 끝에, 드디어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설명이 들어간다면 다시 납득할 수 있는 플롯이 됩니다.
이렇게 주인공, 또는 등장인물들의 행동 양태를 만들어나가면서 개연성을 부여하다 보면, 어느새 멋진 플롯을 가지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이 흔히 작가들이 “등장인물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가게 됩니다.”라고 말하는 경우에 속합니다.
플롯은 반드시 필요한가?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플롯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대답은-적어도 내 대답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 소설 창작이란 어떤 이야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 나의 기본적인 신념이다.
스티븐 킹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런 예를 앞에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금방 본 이야기는 엄밀히 말해서 전통적인 플롯 구성법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상황(한 사람이 갑자기 표독스러워졌다)을 설정하고 그 다음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이용한 것뿐이죠.
미국의 소설가 피츠제랄드(Francis Scott Key Fitzgerald, 1896~1940)는 인물이 바로 플롯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피츠제랄드의 말도 맞습니다. 어떤 사람 하나를 창조해내는 것으로 우리는 멋진 소설을 탄생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플롯을 중시하는 작가만큼이나 많은 작가들이 플롯을 따로 만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면에서 곤혹스러운 것은 대단히 훌륭한 얼개(=플롯)를 가진 작품을 쓴 사람이 플롯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일 것입니다.
가령 아시모프는 플롯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 그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느냐? 나도 설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황당한 이야기입니다. 그토록 수많은 정교한 SF와 추리소설을 써온 작가가 플롯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오랫동안의 깊은 사색이 필요하고, 글쓰고 생각하는 동안에 다른 일을 거의 할 수가 없다는 사실뿐이다.
그럼 플롯은 필요 없는가?
플롯을 만드는 일은 여러 가지로 표현됩니다. 얼개를 짠다, 아웃라인을 만든다, 스토리를 형성한다, 사건을 구성한다 등등. 이런 여러 가지 말들이 있어서 플롯이라는 게 뭔지 머리 속에 잘 안 들어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어떤 작가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카드를 만듭니다. 등장인물, 사건, 배경에 대해서 각 카드에 다 기록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재배열해나갑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플롯은 재배열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앗, 이 대목에서 예리한 질문이 들어옵니다.
“재배열이라면 시간 순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플롯이 없는 이야기가 된다는 말입니까?”
천만에요. 그것을 우리는 평면적 구성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평면적 구성이 플롯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플롯이 매우 전형적인 <심청전>을 봅시다. <심청전>은 소설 기법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소설답게 시간 순으로 사건이 배열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일상사를 그대로 옮기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소설도 필요 없는 일상사를 그리지 않는 법입니다. 즉, 소설 속의 시간은 균일하게 흐르지 않습니다. 심청이 황후가 되는 데까지 한 방향으로 흘렀던 시간은 심봉사가 뺑덕어멈과 만나는 대목에서는 역류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죠. 소설은 일기도 아니고, 수필도 아닙니다. 소설 속의 시간은 작가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평면적 구성에서도 플롯은 존재하는 법입니다. 특히 현대의 소설가들이 평면적 구성을 택했다면, 그것을 통해 노리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평면적 구성은 단순한 구성을 가진 만큼 독자들을 사건 속에 더 집중시키는 효과를 가집니다.
문제는 “재배열”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작가는 무엇을 위해서 인물과 사건과 배경을 재배열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재배열했을 때 독자와 더 잘 교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자의 이해를 더 빨리 가져올 수 있도록, 독자가 글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플롯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플롯이 필요 없다거나, 플롯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겠다는 저 대가들은 대체 어찌 된 것이냐고요? 그 대답은 이미 아시모프의 말에 나와 있습니다. 플롯의 구성이 몸에 습관처럼 밴 작가들은 의식하지 않고도 플롯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가능합니다. 많이 읽고, 많이 써 본다면.
하지만 아직은 플롯을 세워보는 것이 여러분한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앗, 분량이 이미 넘치는군요. 플롯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 강의로 넘겨야 하겠네요
- 발단 -
이제 플롯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해봅시다. 이미 여러분이 잘 알고 있겠습니다만, 다시 한 번 이야기합니다. 단편소설의 플롯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집니다.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 대단원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위의 순서는 글의 순서이지, 결코 시간의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아기가 태어나서(발단), 자라나고(전개), 사랑을 하게 되면서(위기), 결혼에 이르러(절정), 행복하게 살았다(대단원)는 식의 순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같은 글은 위인전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소설은 되기 힘들겠습니다.
그럼 이들을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죠.
발단은 소설에서 결말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여기서 독자들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소설은 더 이상 읽히기 힘들게 됩니다. 발단에서는 앞으로 어떤 문제를 다룰 것인지, 그 문제를 다룰 사람들은 누구인지가 나타나 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추리소설을 예로 들어봅시다.
정통 추리소설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이런 것입니다. "범인은 소설의 주요 인물로 초기에 등장해야 한다."
추리소설을 읽으며 범인을 열심히 추측했는데, 지나가던 우유배달원이 범인이었다는 식으로 끝나면 황당하겠지요? 따라서 범인은 초기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이어야 한다고 정의한 것입니다.
일반소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문제를 제시하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꼭 사건을 통해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음 글은 이상의 <날개> 중 발단의 한 부분입니다. 이것을 읽고 이야기를 계속하죠.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 유쾌하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으레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았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 나는 또 여인과 생활을 설계하오. 연애 기법에마저 서먹서먹해진, 지성의 극치를 홀깃 좀 들여다본 일이 있는,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精神奔逸者) 말이오. 이런 여인의 반(半) ―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領收)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 놓고 흡사 두 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 둔 모양이요. 굿바이. 굿바이.
이상의 <날개>에는 사실상 두 명의 인물만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인물들이 발단에서 다 등장하고 있죠. 주인공과 주인공이 반만 차지하고 있는 여인. 주인공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우리는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라는 알쏭달쏭한 말로 시작해서, 본래 유쾌할 수밖에 없는 "연애"를 마치 불쾌한 것인 양 취급하는 발언에서 화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채게 되는 것이죠. 살짝 미친 사람 이야기 같긴 하지만, 그래도 왜 이 작자가 연애도 불쾌하다고 생각하고 "여인의 반만 영수한다"는 알쏭달쏭한 말을 하는지 우리는 궁금해지고 맙니다. 그러니 무슨 도리가 있겠습니까? 소설을 계속 읽어봐야죠. 결론에 도달할 때, 우리는 이 소설의 제일 첫머리에 도전적으로 나온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그리고 "반만 영수한 여인"이 이 글의 전체를 이끌어가고, 이 글이 주장하고 싶었던 이야기 전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발단에서 다루겠다고 이야기한 문제를 결말에서 다루지 않는 것은, 살인사건을 수사했는데 결말에서 강간범을 체포하는 것과 같이 생뚱맞은 일이 됩니다.
"인생이란 본래 부조리한 것 아닙니까? 무슨 이야기를 쓰건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라고 말할 사람이 혹 있을까요? 그것은 주제를 부조리한 인생에 두고 있는 것이므로 발단에서 역시 그 문제를 이야기하겠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이야기만 더 합시다.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단편소설에서의 발단에 한정되는 이야기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장편소설의 경우는 좀 더 복잡한 발단을 가지게 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은 같은 분야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장편소설도 크게는 같은 플롯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지만, 역시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단순화한 이야기겠습니다.
- 전개 -
전개에서 이제 이야기는 구체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발단에서 제기된 문제가 구체화되는 단계가 바로 전개입니다.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나타나게 되고 갈등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갈등"이 등장했군요. 소설에서 "갈등"이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갈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설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미 발단에서 소설이 다룰 문제를 제기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전개에서는 그 문제를 다루게 되는데, 문제를 다룬다는 뜻은 문제가 일으킨 갈등을 이야기한다는 말과 똑같은 것입니다. 갈등의 형태는 매우 다양합니다. 그것은 주인공 내부의 문제일 수도 있고(내적 갈등), 주인공과 사회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외적 갈등).
그러나 이러한 갈등을 작가가 선언하려고 들면 안 됩니다. 갈등을 선언하고, 단정지어버린다면 그것은 논설문이지, 소설이라 볼 수 없습니다. 소설은 어디까지나 그 갈등을 사건 속에서 풀어나가야 합니다. 단지 작가가 독자들을 가르치겠다고 생각하고 글을 쓴다면 그것을 소설로 쓸 필요는 없습니다. 논설문을 쓰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설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설가는 갈등을 사건 속에서 설명해나갑니다. 그것이 바로 "전개"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전개에서 갈등은 점점 더 복잡하고 힘겨운 상황으로 업그레이드되어갑니다. 도무지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지경까지 갈등이 고조되면 이제 "위기"의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 위기 -
"위기"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한 지점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갈등이 최고조에 도달했다는 말은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내려와야 하겠지요? 이때 내려가는 방향은 전개로부터 이미 암시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작가와 독자 간의 힘겨루기가 이루어집니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결말을 향해 내려가게 되면, 독자들은 시시한 작품을 보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내려가게 되면 독자들은 신선한 자극을 받게 되겠죠. 이것을 반전이라 부릅니다. 이 대목에서 소설은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 절정 -
단편소설의 경우, 절정과 대단원은 동시에 처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반전이 이루어지면서 독자가 충격을 받게 되는 그 부분이 절정입니다.
특히 단편소설에서는 반전을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주의하세요. 초보자들의 경우 반전을 너무 의식하고 글을 쓰는 바람에, 개연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독자를 놀래기 위하여 개연성을 무시한 반전을 일으키는 것이죠.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가 갑자기 90도로 커브를 틀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차라리 평범한 결론으로 가는 것보다 더 나쁜 방법이라 하겠습니다. 반전보다 중요한 것은 독자와의 대화입니다.
독자를 속여야 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작가는 독자와 주제에 대해서 대화하는 사람이지, 독자를 놀래줘야 하는 마술사인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 독자에게 충격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좋은 방법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독자가 충격을 받을 때, 그 주제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절정과 결말이 동시에 처리된다는 것은 글의 흐름이 매우 빠르다는 뜻입니다. 왜 ‘발단-전개’로 나아가는 것보다 ‘절정-대단원’의 부분이 더 빠르게 진행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위기" 때문입니다. 위기에서 반전이 이루어지는 순간, 결말은 예정되어집니다. ‘발단-전개-위기’로 나아가는 도중에는 많은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고, 작가는 적절히 그 가능성들을 가지치기 해줘야 합니다. 경우의 수가 줄어들면서 이야기는 한 가지 방향으로 집중되게 됩니다. 절정과 결말은 바로 그 집중된 방향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야기의 흐름이 빠를 수밖에 없습니다.
- 대단원 -
소설을 쓰는 초보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대단원에서 모든 이야기를 종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야 하고, 그 매듭을 지어주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글을 썼다고 할 수 없겠지요. 그런데 주의하세요. 끝나는 것은 이야기지, 주제가 아닙니다.
이야기는 해결이 아니라 더 암담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날개>의 주인공이 죽어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독자는 그 죽음으로부터 "박제가 된 천재"라는 서두의 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지요. 하나의 사건은 거기서 끝이 나지만 우리는 새로운 문제를 이곳에서 만납니다.
그러나 이렇게 새로운 문제가 갑작스러운 평지돌출로 제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문제는 서두로부터 전개와 위기, 절정을 거쳐 필연적으로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제기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했을 때 우리는 그 소설의 구성이 엉성하다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 기본을 튼튼하게 -
소설의 플롯을 5단계로 나눈다고 해서 그 5단계가 동등한 분량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설은 다양한 형태를 가진 생물입니다. 규정에 너무 얽매이다 보면 창의력이 죽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는 초보자들은 반드시 위의 단계를 거친 글쓰기를 해봐야 합니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데생 과정을 건너뛰지 않는 것처럼, 서예를 하는 사람들이 줄긋기를 뛰어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서예를 배우다보면 정갈하긴 해도 네모반듯하기만 한 궁체를 건너뛰어 날렵하게 보이는 흘림체를 쓰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하지만 궁체를 제대로 터득하지 못하면 흘림체를 써봐야 그 허약한 기초 때문에 글씨만 망가질 뿐,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을 탄탄하게 갖추지 못한다면 변형을 구사할 수 없습니다. 습작 시기에 많은 실험을 해볼 수 있습니다만, 그래도 기본은 정형적인 틀에 맞춰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다보면 어디에 힘을 주고, 어디에 힘을 빼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에 맞춰서 자기 스타일을 키워나가야 합니다. 이제 한번 정교한 플롯을 만들고 글쓰기를 해보세요. 생각보다 훨씬 재미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6. 배경은 무슨 역할을 하는가?
소설은 하나의 세계를 갖는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면 맨 처음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적절한 모델이 하나 있네요. 처음 세계를 만들었다는 이 분이 무슨 일을 했는지 한번 봅시다.
하느님이라 불리는 이 분은 세계의 주인공인 인간을 만들기 전에 바다와 땅, 동물과 식물, 밤과 낮 등을 모두 만드셨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주인공 이외의 이런 것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반드시 이것부터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꼭 만들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배경은 소설이 진행되는 시공간을 의미합니다. 즉, 소설 속의 주인공이 걷고 뛰고 생활하는 그 모든 공간과 시간을 배경이라고 합니다. 이 배경에는 소설이 뿌리박고 있는 단단한 배경에서부터 소설의 의미(주제 또는 작가의 해석)를 좀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치로서의 배경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은 광의의 배경에 속합니다. 말하자면 소설 자체가 성립되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세계관이라고 부르죠. 여기서는 이런 것을 광의의 배경이라고 부르도록 합시다.
흔히 장르 소설이라고 부르는 무협, SF, 판타지 등의 ‘사변 소설’들에서는 이런 광의의 배경을 서두에서 밝히고 가게 됩니다. 어떤 장르는 고정적인 배경을 갖게 되지요. 이를테면 무협 장르는 전근대 중국을 배경으로 하며, 에픽 판타지는 서구 중세를 배경으로 한다는 식이지요. “나는 순문학이라 그런 배경은 안 가지는데요.”라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이 경우는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삼고 있지요. 또한 세부적으로는 서울이라든가, 학교라든가 하는 식의 배경을 가지게 됩니다.
이 배경이 독자에게 정확히 전달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단지 배경만으로도 독자는 작품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엔더의 게임>을 쓴 오슨 스콧 카드는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이야기를 시작한 후 당신의 독자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그것이 판타지가 될 것인가, SF가 될 것인가를 알려야 한다. 만약 글이 SF고 당신이 그것을 독자들에게 알렸다면, 당신은 엄청난 수고를 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독자들은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곳 외에는 알려져 있는 자연법칙이 모두 적용되리라고 가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책을 읽는 독자들은 대개 그 책을 읽기 전에 자신이 읽는 소설이 어떤 성격의 소설인지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요. 마치 예고편을 보고 영화를 보러 가는 것처럼 책의 앞뒤에 적혀있는 글을 보고 작품의 성격을 미리 알게 됩니다. 해리 포터 시리즈를 판타지라는 걸 모르고 읽는 경우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작가는 자기 작품 안에서 배경을 확고하게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광의의 배경, 즉 주인공들의 삶이 펼쳐지는 거대한 공간은 소설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합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꼭 그려지는 것은 아니며, 그냥 이야기 속에 묻어 있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그 배경이 독특한 것, 작가의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부분이라면 당연히 설명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것이 글을 시작하면서 꼭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이코>라는 판타지 소설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베틀 소리가 멈췄다.
이 짧은 구절 하나에서도 독자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베틀이 사용되는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박민규 작가의 <지구영웅전설>을 보면 다섯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소설의 배경이 미국의 마이애미이고 주인공은 아시아 계열의 정신이 살짝 이상하게 보이는 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좀 더 읽으면 주인공의 배경을 더 자세히 알게 됩니다.)
계산된 세계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는 아무리 현실 세계와 유사하다고 해도 작가에 의해 조율된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현실 세계에서 배경을 가져온다 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눈에 비친 세계이며 여러분에 의해 다시 조형된 세계입니다.
따라서 조형된 세계를 설명할 필요가 발생합니다. 이 경우 장편소설에서는 배경에 대해서 설명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만 단편 소설에서는 그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따라서 단편 소설에서는 매우 효율적으로 배경을 설명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런 이유로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들 중에 단편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많지 않은 것입니다. 독자에게 세계관을 빨리 잘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죠. 반면에 SF나 추리소설의 경우는 흥미로운 단편 소설이 많습니다. 그것은 설명해야 할 배경이 핵심적인 부분 몇 가지에 국한되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인 배경은 앞에도 이야기했지만 소설 속에 직접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아주 간략하게 나타나기도 합니다. <홍길동전>은 첫 머리에서 “조선 세종 때의 일”이라고 시간적 배경(세종)과 공간적 배경(조선)을 밝히고 있습니다. 광의의 배경은 이렇게 간단하게 처리되기도 합니다.
그럼 <홍길동전>에는 이 이외의 배경은 없는 것일까요? 그럴 리야 없지요. 하지만 전근대의 소설들의 배경은 매우 간단하고 그 비중도 낮은 편입니다. 소설 작법이 발달하지 못해서 배경이 보여주는 중요함을 아직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땐 어스름이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서풍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면서 나뭇잎들과 속삭이고 있었다. 길은 곧 완만하게 내리막으로 경사가 졌고 차츰 어둠 속으로 접어들었다. 어두워져 가는 동쪽 하늘에 나무들 위로 별이 하나 나타났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맞춰서 용감하게 걸어갔다.
위 구절은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 중 한 구절입니다. 어두운 길이지만 친구들이 함께 걸어가는 편안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표현을 부드러운 방식으로 썼기 때문에 어둠마저도 그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같은 배경이라도 이렇게 쓴다면 느낌이 확 달라질 것입니다.
그들이 길을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땐 어둠이 그들의 주위로 밀어닥쳤고 서풍이 나뭇가지 사이로 지나가면 나뭇잎들을 흔들고 있었다. 길은 완만한 내리막이었지만 그 끝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져 가는 동쪽 하늘엔 나무들 위로 외롭게 별 하나만 반짝일 뿐이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발맞춰서 용감하게 걸어갔다.
그들이 밤중에 완만한 내리막길을 용감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은 동일하지만, 앞의 글과는 달리 비장한 느낌, 뭔가 곧 위기가 닥쳐올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배경은 작가가 계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밝고 화사한 풍경을 묘사하면서 그 배경 속에 있는 인물이 음침하고 어둡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것을 대비로 사용하여 배경이 밝을수록 더 음침해지는 모습을 부각시키겠다면, 물론 가능한 일이겠습니다만 그런 경우는 더욱 세밀하고 정교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주인공이 울면 배경도 울고, 배경이 웃으면 주인공도 웃게 만드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필요한 기교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배경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미건조하게 배경을 선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배경조차 작가의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가령 현기영 작가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많이 썼는데, 그것은 그가 제주도 출신이기 때문이죠.
- 신뢰와 상징
자기가 잘 모르는 배경을 사용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재수가 좋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들에게 걸리면 망신당하기 쉽지요. 물론 이 점은 등장인물이나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긴 합니다.
그런데 등장인물이나 사건보다도 배경에서의 실수는 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앞의 둘과는 달리 배경이란 객관적인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객관적이라 생각하는 부분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게 되면 글 전체에 대한 몰입도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 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글은 독자와 작가가 나누는 대화입니다. 그런데 대화하는 상대방이 신뢰가 가지 않는 엉터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믿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이런 점에서도 배경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이야기라도 조금만 깊이 들어가 주면 그쪽 이야기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나 그쪽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에게나 모두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갈림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고목을 발견했다. 나무는 아직 살아있어서 오래 전에 떨어져나간 큰 가지의 그루터기 근처에는 나뭇잎이 달린 잔가지도 있었다. 그러나 커다란 틈새가 벌어져 있고 속도 텅 비어 있어서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이 글도 <반지의 제왕> 중 한 대목입니다. 식물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은 속이 빈 고목나무는 죽은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래되어 덩치가 커진 나무는 속부터 썩게 됩니다. 나무 자체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지면 자신을 지탱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속부터 썩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나무는 껍질 바로 아래 부분이 살아있어서 영양분을 주고받습니다. 이런 대목은 J.R.R 톨킨이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작가는 날카로운 관찰력과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는 검색 재주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잘 모르는 부분을 쓰게 될 때는 잘 아는 사람의 조언을 구해보는 것이 좋습니다. 즉, 취재를 하는 것도 필요한 일 중 하나입니다.
배경은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상징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국경의 기다란 터널을 빠져 나오자 ‘설국’이었다.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이 세계와 다른 세계로 우리가 들어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상징입니다. 배경을 상징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죠. 이처럼 짧은 문장에서 강렬한 느낌을 갖게 만드는 것은 쉬운 재주가 아닙니다. 배경이라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을 작가의 철저한 계산 아래 묶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7. 인물은 어떻게 묘사되는가?
인물의 설정
인물은 소설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들은 인물에 매료되고 그 인물의 행동, 사상, 사건에 빨려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내는가 하는 문제는 소설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작가들은 플롯은 필요 없다, 인물만 있으면 소설을 쓸 수 있다고까지 주장하죠.
소설을 쓰려는 여러분은 먼저 인물을 창조해내야 합니다. 플롯에 어울리는 인물을 상상해내는 거죠. 만일 여러분이 전형적인 로맨스 소설을 구상하고 있다면 남자 주인공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돈 많고, 능력이 있으나 싸가지가 없는 미남
그런데 여러분이 만일 정말로 인물을 저렇게만 설정한다면 그 소설은 출판될 가능성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평가에서도 좋은 평을 받기는 애초에 글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위의 설정은 찰흙공예로 말한다면 철사 뼈대 정도를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포즈를 잡기 전의 모습이죠.
위의 설정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설정입니다. 그것만으로는 독창성이 없기 때문에 인물로서는 실격인 것이죠.
여기에 그 인물만이 갖는 특성들을 부여해야 합니다. 하나하나 생각해 나가도록 하지요. 키는? 체격은? 큰 키에 깡마른 스타일로 설정하면 어쩐지 신경질적인 사람이 떠오릅니다. 첫인상은 신경질적인데, 알고 보니 마음이 여리고 부드러운 사람이지만 표현을 잘하지 못해서 오해를 쉽게 사는 사람이라고 해보죠. 그런데 왜 표현을 잘하지 못하게 되었을까요? 어려서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라면서 애정 표현에 서툴러진 거라고 하면 어떨까요? 표현에 서툰 만큼 주목받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격이 되었지만 큰
키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한눈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 때문에 늘 어깨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다니는 습관이 붙었고, 발밑을 보면서 걷습니다. 그러다가 여자 주인공과 부딪치는 장면을 만들 수 있겠군요! 더구나 표현에 서투르다는 설정에 따라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하고, 여주인공은 그 때문에 매우 화가 나게 됩니다. 물론 이후의 이야기는 플롯에 따라 진행되겠지요.
남자 주인공의 성격도 아직 보강할 부분이 많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특정한 행동을 할 때 일관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그렇게 하려면 세부적인 특성까지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되도록 그런 성격을 표로 만들어 따로 적어 놓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성격에 위배되는 일을 했을 때는 그에 따른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게 마련입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낯선 곳에서 주눅이 들고 제대로 의사 표현을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과감하게 앞으로 나서서 일장 연설을 한다든가 할 수는 없죠. 하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용기를 낸 것이라면 문제가 좀 달라집니다. 다만 그 다음에 그에 대한 주인공의 감정 변화가 잘 나타나 주어야만 합니다.
설명과 묘사의 구분
설정을 잘 잡았다고 그것이 바로 소설이 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글쓰기의 초보자들은 설명과 묘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물에 대해서 설명해 놓고 독자들이 그 인물에게 매력을 느끼기를 바란다면 그건 그야말로 난센스죠.
소설에서 설명이란 적을수록 좋은 법입니다. 특히나 불필요한 설명이 되면 그건 글에 마이너스 요소가 될 뿐입니다. 가령 잘생긴 캐릭터를 설명한다고,
그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미남이었다.
라고 쓴다면 글쓰기에서 낙제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써야죠.
그가 지나가자 귀부인들 사이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모두 그의 얼굴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묘사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묘사는 독자들의 상상력을 개방시킵니다. 반대로 설명은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합니다. 그 틀 안에서 사고하기를 강요하게 되는 거지요. 풍부한 묘사는 독자들의 잠자고 있는 감성을 건드려 활성화 시킵니다. 독자들은 묘사를 좇아가며 인물들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고 구체적인 형상을 마음속에 만들어갑니다. 이 모습이 작가가 상상하고 설정했던 그 모습과 일치하게 된다면 작가의 의도가 100% 달성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 순간 작가도, 독자도 만족스러운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물의 성격은 행동 묘사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좋습니다. 몸이 허약한 인물을 설정했다면, 첫 대목에서
정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컬레이터 앞에는 고장이라는 팻말이 놓여 있다. 벌써부터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정희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고 계단 옆의 난간을 붙잡았다.
이런 묘사를 통해서 우리는 정희라는 인물이 허약한 체질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광경을 쉽게 눈앞에 그려볼 수도 있지요. 눈앞에 쉽게 묘사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인물에게 동화되기도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만큼 작품 속에 빠져들도록 만든다는 것이죠. 그러나 만일 같은 대목을,
정희는 에스컬레이터 없이 계단을 오르기에는 너무 허약한 체질이었다.
라고 쓴다면, 안 될 것은 없겠지만 참 재미없는 문장이 되고 만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또한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게 된다는 점도.
그러나 중요하지 않은 인물까지 일일이 묘사를 통해서 성격을 드러내고자 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등장인물들은 전형적인 묘사나 설명을 통해서 간단하게 정의를 내려주어도 됩니다. 소설쓰기에서도 강약을 타는 리듬감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것을 해내지 못하면 소설은 지루해지고 맙니다.
성격 묘사
작가는 묘사를 통해서 독자들을 주제로 인도하게 됩니다. 이미 강의한 것처럼 그것은 배경에서도 그렇고, 인물에서도 그런 것이죠. 따라서 비중이 높은 인물일수록 그 묘사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어떤 인물이 방안에 들어와 자리에 앉는 대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도 인물의 성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1) 그는 곧장 침대에 가 걸터앉았다. 머리를 쥐어뜯듯이 붙잡고는 오늘 일이 왜 그렇게 된 것인지 생각했다.
(2) 그는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면 오늘 일을 차분하게 되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3) 그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일단 한숨 자고 나면 오늘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번 성격의 남자는 고민이 많은 사람입니다. 우유부단한 면도 가지고 있군요. 일을 맺고 끊는 데 서투르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번 성격의 남자는 행동성이 강한 사람입니다. 빠른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겠군요.
(3)번 성격의 남자는 일을 미루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귀찮은 것은 질색인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입니다. 외모적으로 뚱뚱할 가능성이 있겠네요.
이런 행동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성격과 글에 나타나 있는 다른 행동 또는 설명이 모순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인물에 대해서 생각할 때는 그 인물 자체가 되어보아야 합니다. 그라면 어떻게 말할 것인가, 그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잘 생각해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평소에 사람들을 잘 관찰하는 것이 필요하죠. 또한 성격에 대한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혈액형과 별자리에 따른 성격 같은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유사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성격은 실상은 매우 모호하고 모순된 것들을 섞어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알아둘 필요는 있지요. 그런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선입관에 대한 성격 묘사에 이런 것들이 좋습니다. 관상학도 마찬가지죠.
MBTI 같은 심리학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간 성격에 대해서는 참고할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소설을 쓰면서 “칼 융이 말한 바와 같이...” 운운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설명이거든요. 더구나 매우 재미없는.
인물을 드러내는 방법
이미 인물의 행동은 인물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물을 나타내는 방법으로 중요한 것은 인물의 이름과 대화입니다. 먼저 이름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인물의 이름을 정하는 방법은 작가들의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일 중 하나입니다. 물론 이름에 전형적인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특정 관계 아래 있지 않다면 비슷한 이름을 사용하지 마세요. 민철, 민호, 민수, 영호, 철호, 철민, 철수 등이 주요인물로 나온다면 독자들은 읽다가 인물들을 혼동하기 쉽습니다. 이들이 형제 관계가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지요. 물론 이름 자체에 복선을 설정하였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습니다. 이름이 노골적으로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것도 일종의 설명이 되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미남이는 이름대로 미남이었다”는 식의 설명은 작가가 굉장히 무성의하게 이름을 지었다는 인상밖에 남길 것이 없습니다.
이보다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인상을 주는 것은 대화입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야말로 그 사람을 보여주지요. 실제 사회에서도 겉모습은 그럴 듯한데, 입을 열면 무식이 폭로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듯이, 소설의 세계에서도 대화는 그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사용됩니다.
“아따, 허벌나게 좋소.”
라고만 써놓아도 말하는 사람이 호남 출신이며 그다지 교양이 깊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8. 대화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
대화,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 것
소설에서 대화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소설이란 결국 대화문과 지문으로 이루어진 것이니까요. 소설에 대한 책들이 대화에 대해서 별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나는 늘 의아해집니다. 이처럼 중요한 이야기를 왜 하지 않는 걸까요?
그런 의문은 지금은 치워놓읍시다. 일단 소설 속에서 대화가 하는 원론적인 기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죠.
첫째, 대화는 인물의 성격을 나타내는데 사용됩니다. 독자는 대화를 통해서 생생한 인물 정보를 얻게 됩니다. 따로 인물의 성격 묘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지요. 인물에게 사투리를 사용하게 해서 그의 지역적 배경을 보여주거나, 유식한 말들을 늘어놓게 해서 그의 학력 배경을 보여주거나, 까칠한 성격, 무모한 성격, 남을 배려하는 성격 등을 모두 대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습니다.
둘째, 사건과 배경을 설명합니다. 어떤 사건을 설명할 때 그것을 지문으로 길게 쓰면 글 전체가 지루해지게 되고 맙니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서 간추리게 되면 불필요한 이야기들을 줄이고, 핵심적인 부분을 쉽게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작가의 말을 대신합니다. 자칫하면 설교로 보일 수 있는 글도 대화를 통해 표출하면 등장인물의 생각으로 위장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했을 때, 독자에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주제의식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위의 세 가지 기능은 글을 "잘 썼을 때" 효과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화문을 잘 쓰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그럼 초보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죠.
누가 말하고 있는가?
가장 중요하지만 잘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누가 말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게 쓰는 버릇입니다. 전후 상황 상 누가 말하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면, 분명하게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방 안에 여러 사람이 있는데, "엄마야! 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해봅시다. 짧은 말이지만 저 말에서 말한 이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이 대화문이 나오기 전에 그 방에 여자는 한 명밖에 없다는 설정을 이야기해놓았다면 이 경우 누가 말했는지 명시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여자가 두 명 있었다면 문제가 다르죠. 그 방에는 남녀 친구들이 있었다고 해두고 아래 예문을 한 번 읽어 봅시다.
(1)
"엄마야! 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
철수가 말했다.
"누구야? 정전됐다고 감히 우리 영희 엉덩이를 만진 게!"
(2)
갑자기 정전이 되어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
"누구야? 감히 우리 애인 엉덩이를 만진 게!"
(1)번 글은 간략하고 깔끔하게 대화를 통해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저 대화문을 읽고 독자는 현재 정전 상황이라는 것, 철수와 영희가 애인 사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번 글을 통해서는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정전된 방에는 친구들이 있었다고 했으므로 비명을 지른 사람이 누군지 그 방에 있던 사람들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방 안에 있는 등장인물들은 아는 상황을 글을 보고 있는 독자는 모르는 상황으로 만들어버린 것이죠. 이런 식의 이야기는 매우 좋지 않습니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앞의 묘사입니다. 다시 한 번 보지요.
갑자기 정전이 되어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큰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먼저 파란 부분을 보지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므로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안 놀랐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는 방 안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독자에게 알려주는 셈입니다. 그리고 빨간 부분을 볼까요? 비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큰 소리를 의미하죠. 작게 비명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면 굳이 "큰소리로"라는 불필요한 설명을 달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1)번 글처럼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전달할 수 있다면 (2)번 글처럼 쓸 이유가 없습니다. (2)번 글은 소설을 지루하고 재미없게 만드는 일등공신이라 하겠습니다.
- 실제 같이 쓰지만 실제의 반영은 아니다
대화는 사실적으로 묘사해야 하지만 진짜 사실을 그대로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묘사도 마찬가지지만, 불필요한 것들은 생략하는 것이 좋습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수고했다. 내 새끼."
"엄마, 오늘 학교에서 있잖아."
"무슨 일이 있었니?"
"영호가 자빠져서 팔이 부러졌어."
"어머나! 어쩌다가 그랬니?"
"점심 시간에 계단을 내려가다가."
"얌전히 내려가지 않았구나?"
"걔는 늘 두세 계단을 뛰어서 내려가."
"넌 안 그러겠지?"
"내가 바보야?"
매우 사실적인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자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길이에 비해서 별로 유용한 정보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정도로 줄이는 것이 좋습니다.
철수는 집에 오기가 바쁘게 엄마를 붙잡고 말했다.
"점심 시간에 영호가 계단을 뛰어서 내려가다가 팔을 부러뜨렸어! 걔가 그럴 줄 알았다니깐."
"넌 안 그러겠지?"
"내가 바보야?"
훨씬 간단하게 정보가 전달되었죠. 그런데 저 사건이 이미 앞에서 상세히 묘사된 것이었다면 어떨까요? 그런 경우는 이런 설명조의 대화문이 별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 간략하게 쓰는 것이 더 좋습니다.
철수는 집에 오기가 바쁘게 영호가 다친 이야기를 엄마에게 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엄마가 물었다.
"넌 안 그러겠지?"
"내가 바보야?"
이미 독자가 알고 있는 상황을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것만큼 지루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 글이 있다면, 거기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합시다. "넌 안 그러겠지?"와 "내가 바보야?" 사이에 이런 말을 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철수가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앞에 들었던 예문 - "엄마야! 누가 내 엉덩이를 만졌어!" "누구야? 감히 우리 애인 엉덩이를 만진 게!"의 사이에도 이런 말을 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분노한 철수가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져서 분노해서 외쳤다.
이미 대화문에서 퉁명스러운 것과 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위와 같은 설명들은 불필요한 중복일 뿐입니다. 대화 안에서 대화하는 사람의 감정을 충분히 선보이도록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하며, 그 대화에 일일이 설명문을 붙이는 것은 글을 지루하게 만들고, 독자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아래 두 예문을 비교해 보세요.
(1)
엄마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안 그러겠지?"
철수가 입을 비죽거리며 핀잔했다.
"내가 바보야?"
엄마는 그 말에 기분이 상한 듯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넌 오늘 컴퓨터 금지야!"
철수는 몸서리치며 말했다.
"엄마는 독재야!"
(2)
"넌 안 그러겠지?"
"내가 바보야?"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넌 오늘 컴퓨터 금지야!"
"엄마는 독재야!"
(1)번 글은 대화를 한 번씩 더 설명해 주고 있는 글에 불과합니다.
- 대화를 쓰면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
최근의 많은 소설에서 별 고민없이 대화문 안에 의성어를 집어넣거나, 말줄임표를 남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것은 매우 조심스럽게 써야 합니다.
"으드득! 어디 내가 가만 두나보자!"
누구도 실제로 "으드득", "빠직", "빠드득" 같은 것을 말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의성어는 상황을 설명하는 지문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대화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위 문장은 이렇게 쓰는 것이 맞지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디 내가 가만 두나보자!"
말줄임표의 경우도 고민 없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안해."
위와 같은 문장은 말하는 사람이 머뭇거리다가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사용된 방법이지만 사실은 그 머뭇거린다는 것을 잘 묘사해내기 어려워서 택한 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화를 이어나가는 리듬감에 의해서 지문을 넣지 않고 처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할 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럴 때면 한 번 더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저 부호의 이름이 왜 "말줄임표"인지 말이에요. 대체 "미안해" 앞에 무슨 말이 "줄어" 있을까요? 또 아래와 같은 문장을 보세요.
"그…… 그것은…… 쉬운 일이……."
위 문장은 이렇게 쓰는 것이 맞습니다.
"그, 그것은, 쉬운 일이……."
"쉬운 일이" 다음에 "아닙니다"가 생략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의 말줄임표는 말을 더듬고 있거나 다음 말이 나오는데 시간이 걸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말줄임표"가 아니라 "쉼표"지요.
9.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인칭 시점이란?
소설이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마치 내가 본 것처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1인칭 시점이라고 하지요. 1인칭 시점에도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목격자로서의 1인칭 시점, 즉 1인칭 관찰자 시점, 그리고 주인공으로서의 1인칭 시점, 즉 1인칭 주인공 시점이 있습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과 1인칭 주인공 시점은 무엇이 다를까요? 한쪽은 주인공이 아닌 점이 다르다고요? 시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시점 자체에만 한정지어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1인칭 관찰자 시점과 1인칭 주인공 시점의 가장 큰 차이점은 1인칭 관찰자 시점이 더 넓은 시야를 가진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이 알지 못하는 일들도 관찰자는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글을 쓰는 데 유리하게 작동할 수 있지요. 심지어 주인공이 죽은 뒤의 이야기도 관찰자는 해줄 수 있습니다.
장자는 끝내 수추의 목을 자르라고 명했다. 수추의 목이 잘려 저자의 장대 위에 드높이 효수되었다. 장대 위에 얹힌 얼굴은 이 세상에서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던 행복한 자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은 더욱 더 수추가 남긴 노래들을 불렀다. 장자는 드디어 수추에 대한 기억의 잔재를 모두 없애버리라고 명했다. 다리는 허물어지고, 오동나무 밑동은 뽑혀지고, 나는 강 건너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장터 사람들의 소문에 의하면 수추의 노래는 여전히 불려지고 있으니 그가 죽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얘기였다.
(황석영, <가객> 중에서)
위의 소설은 황석영의 <가객>이라는 소설로 주인공은 가객 수추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을 가지고 있는 “나”는 문둥이 깨꾸쇠입니다. 위에 나온 것처럼 주인공이 죽은 뒤의 이야기도 써나갈 수 있으므로 작가로서는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런 시점을 잘 활용하는 장르가 추리소설입니다. 비범한 천재 탐정과 동행하는 관찰자는 독자와 같은 눈높이를 가지고 탐정의 행동을 설명합니다. 독자들은 서술자를 따라서 탐정의 행동을 보며 단서를 찾아가게 됩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은 습작 시절에 제일 많이 손대보는 시점일 것입니다. 자기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써내려가면 쉽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 해서 작가 자신이 글 속에 나타나면 곤란합니다. 작가는 작품에 있어서는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신(神)입니다. 따라서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취하면서 인간이 아닌 신이 되어버려서는 곤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는 주인공의 성격 설정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인공이 편협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받아들이는 세계와 사물의 묘사도 편협함을 반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편협함을 통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까지 표현해내야 하기 때문에, 사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은 결코 만만한 글쓰기라고 할 수 없답니다.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대하 장편소설 같은 것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인칭 시점도!!
실험적으로 2인칭 시점이 시도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2인칭 시점이란 결국 1인칭 시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먼저 예문을 보지요.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것은 네가 여섯 살 때다. 그때 너는 사흘째 다락에 웅크리고 있었다. 너를 거기 집어넣은 것은 네 어머니였으리라. 깊은 밤, 어머니는 너를 흔들어 깨우고, 칭얼대는 너를 덥석 안아다가 다락에 밀어넣은 뒤 말했으리라.
(진산, <잠자는 꽃> 중에서)
분명 2인칭인 “너”가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해주고 있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지요. 그야말로 극단적인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3인칭 시점이란
흔히 3인칭 시점과 전지적 시점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를 보는데, 사실 소설을 쓰는 입장이 아니라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설을 쓰는 입장에서는 이것을 반드시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먼저 3인칭 시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요.
3인칭 시점에도 여러 가지 시점이 그 안에 있습니다. 먼저 객관적 3인칭 시점(극적 제시라고도 부릅니다)이 있습니다.
이 시점은 등장인물들의 내면묘사를 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영화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는 소설과 달리 배우의 마음속을 알 길이 없습니다. 별도의 내레이션이 없는 한, 우리는 배우의 행동을 보면서, 그가 손을 떨면 - 긴장했다, 그가 담배를 거푸 피면 - 고뇌에 차 있다, 그의 눈시울이 젖어들면 - 슬픔에 빠졌다 등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도 주인공의 내면을 묘사하지 않고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서만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장편소설을 쓰는 데는 부적절한 방식이고 단편소설에서 가능합니다. 희곡적 양식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습니다.
위 시점에서 알 수 있듯이, 3인칭 시점이라고 해도 누군가의 내면을 보여주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훨씬 보편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낭패다. 구라지는 입술을 깨물었다. 빠져 나갈 곳이 없다. 너무 서두른 것이 실수였다. 산을 따라 길을 잡았어야 했다. 본진의 뒤편으로 적군이 포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문영, <축생> 중에서)
위 예문에서 세 번째 문장부터는 구라지의 생각을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3인칭 소설이지만 한 사람의 내면을 파고 들어가는 시점을 “3인칭 선택적 전지”라고 부릅니다. 단편소설에서 이런 시점이 아주 흔히 사용되는데, 이때 주의할 것은 시점이 오락가락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점을 혼란스럽게 드나들게 되면 소설의 집중도가 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시점은 이미 “3인칭 선택적 전지”가 아니라 “전지적 시점”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3인칭 시점에서 여러 사람의 내면을 드나들며 서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3인칭 복수 선택적 전지”라고 부릅니다. 장편 소설에서는 흔히 이용되는 방법입니다. 다만 이 경우, 문단마다 시점이 바뀐다거나 해서는 안 되며, 대개 글의 진행 순서에 따라 주요 역할을 하는 인물의 내면 묘사를 통해 글에 대한 이해력을 높이는 방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분이는 그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총명해보이고 맑은 눈은 처음이었다. 그 흑단 같은 까만 눈동자 안에 자기 모습이 보였다. 볼이 발그레 물들어가는.
소년도 소녀의 눈 속에 빨려 들어갔다. 우물가에서 들려 온 웃음소리에 무심히 바라본 곳, 천녀 같은 소녀가 있었다. 그 소녀가 달려왔다. 그리고 어느새 소녀의 눈 속에 자신이 앉아 있었다.
(이문영, <조강> 중에서)
위 예문은 분이라는 소녀의 시점에서 강수라는 소년의 시점으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기법은 소설을 복잡하게 만들고, 자칫 잘못하면 독자들에게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하지만 잘 사용하면 소설의 구조를 탄탄하게 하고, 극적 긴장도를 한껏 높일 수 있습니다.
전지적 시점에 대해
작가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이 신의 권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시점이 바로 전지적 시점이라 하겠습니다. 전지적 시점도 두 가지로 세분화될 수 있습니다. 서술자가 작가 자신인 경우와, 서술자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도 결국은 서술자가 작가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이 경우와는 전혀 다릅니다.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작가가 관찰자의 뒤에 있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관찰자 자신에게도 이미 작가가 부여한 인격이 있기 때문에 작가는 그 인격의 틀 안에서 움직일 뿐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하는 시점에서는 작가는 인물로 등장하지 않은 채 작품 속에 개입하게 됩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의 소설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습니다. 절대적 서술자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모더니즘은 작가가 직접 등장해서 독자를 상대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방식은 매우 촌스럽고, 작품의 몰입을 방해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시점을 택한 경우 작가는 독자를 상대로 설교하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또한 작가가 등장해서 시공간이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게 되면, 독자 입장에서는 글에 대한 흥미가 떨어지게 됩니다. 궁금증을 가질 새가 없이 의문이 풀려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파리에서 여행을 떠난 애인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한참 쓴 뒤에, “한편 스페인의 마드리드에 있는 그녀의 애인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는 식으로 글을 쓰면 극적 긴장도가 뚝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가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모든 인물의 내면을 살펴보고, 묘사하는 서술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를테면 “중립적 전지 시점”도 작품의 긴장도를 해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독자들은 오해와 갈등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확연히 알게 되고, 따라서 편안하게 글을 읽게 됩니다. 그만큼 극적인 부분이 사라지게 마련이죠.
시점의 일관성을 지켜야
한 장면에서 두 사람의 내면을 묘사하게 되면, 독자는 작가가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몰입했던 소설에서 빠져나오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시점을 사용하는 것은 작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글을 잘 전달하기 위해 어떤 시점을 사용할 것인가를 신중히 결정하고, 결정한 뒤에는 스스로 그것을 어기지 말고 일관성 있게 글을 써야 합니다. 독자는 작가가 정해준 시선을 쫓아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10. 문장을 쓰는 요령은 무엇인가?
소설은 문장으로 구성된다
문체라는 말은 대개 학교에서 처음 듣게 됩니다. 가령 화려체니 건조체니 만연체니 하는 것들을 문체라고 배우기 때문에 문체라는 것은 그저 단순한 암기 항목으로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이 문체라는 용어는 우리말로 하면 그 의미가 상당히 축소되어 버리는데, 영어로 이야기하면 느낌이 확 달라집니다. 그럼 영어로 문체를 뭐라고 할까요? “스타일style”이라고 부릅니다.
우린 어떤 작품을 읽고 흔히 이런 대화를 합니다.
“이번 작품은 영 그 작가의 스타일이 아니었어.”
그런데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바꿔 볼까요?
“이번 작품은 영 그 작가의 문체가 아니었어.”
느낌이 확 달라져 버리지요? 우리가 문체라는 것을 수사학적인 것-간결체, 만연체 등-으로만 고정관념처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스타일”이란 무엇일까요? 이 말은 사람한테도 흔히 쓰지요?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요.
“현이는 스타일이 참 좋아.”
스타일이란 그 사람의 개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문체라는 것은 바로 그 작가의 개성적인 스타일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의 스타일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그 사람의 외양을 보고 하는 말인 것처럼, 소설에서 스타일이라 함은 바로 그 소설의 드러난 모양, 즉 문장을 보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제건 소재건 플롯이건 간에 소설이라는 것은 무조건 문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문장이 작가의 스타일을 보여 준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철학자 뷔퐁은 <문체론>(1753)이라는 책에서 “문체는 인간 그 자체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 것이지요. 쇼펜하우어도 “문체란 마음의 얼굴”이라는 말로 문체를 정의하기도 했답니다.
문장에는 글쓴이의 사고방식이 스며 있습니다. 성급한지 꼼꼼한지 편집증적인 증세가 있는지 호탕한지 꽁생원인지 문장을 보면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문장이라 하면, 이건 의미가 좀 달라집니다.
소설에는 소설에 맞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가 나를 기다린다고 들었다. 나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 차고 메마른 이 서쪽 땅은 화려한 궁전으로도 그 쓸쓸함을 덮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마저도 흰색인 이곳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려면 오직 그가 오는 길밖에 없을 테니까.
그는 쉽게 오지 않았다. 삭풍이 불어와 끝까지 버티던 성마른 잎사귀를 떨어뜨린 뒤에도 그가 떠났다는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의 출발이 더딘 것은 나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을 것이니 그가 와야만 한다. 이제 해가 바뀌면 더 이상 나를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내 기다림이 대륙의 서쪽 끝, 천애의 궁궐을 뒤덮을 만큼 크다는 것을.
(문영, <구도> 중에서)
위의 문체를 보면 이 작품은 단편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긴장감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장편을 저렇게 썼다가는 독자들이 긴장감을 유지할 수 없어서 지쳐 버리고 맙니다. 물론 장편의 시작 부분의 특수한 장면이라면 저렇게 넣어줄 수도 있습니다.
문체는 작품에 따라 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소설이라 하면,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모두 포함해 버립니다. 따라서 소설가라고 하면 당연히 단편소설도 쓰고, 장편소설도 쓰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미권에서 단편소설은 short story, 장편소설은 novel이라 하여 둘을 구분해 버리고 있습니다. 소설가 이호철은 단편소설을 쓰는 고충에 대해서 이런 말도 하고 있지요.
그렇게 써놓고 몇 번씩 읽어보니, 도무지 맛대가리가 없더라고요. 이렇게 써가지고 누가 이걸 읽겠나? 예를 들어 여기까지 읽다가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고 다시 이걸 되찾아 읽을까? 무엇인가 당기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여기까지 쓰면서 몇 번 되읽어보니. 그럼 힘이 도통 보이지 않는 거예요. 문장도 서술조고, 그야말로 맥이 수울 빠지는데……
(<이호철의 소설창작 강의> 중에서)
이렇게 고생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절한 문장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단편소설에서는 문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훨씬 높기 때문입니다. 장편소설은 읽어나가면서 그 세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문체에도 눈길이 가겠지만 결국은 그 이야기의 힘에 빠져들게 마련이죠.
그런데 단편소설은 빠져들기가 장편소설만큼 쉽지 않습니다. 빠져들 만하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죠. 따라서 이야기 속에 독자들을 잡아 놓으려면 그만큼 문장이 중요합니다. 아주 적절한 단어들을 골라서 독자들을 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하죠.
이미 18세기에 “문체란 적당한 곳에 적당한 단어를 쓰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조너선 스위프트랍니다.
단편소설에서는 이 비중이 훨씬 큽니다. 그런데 문체란 단편소설과 장편소설에 따라서만 갈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설의 성격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쉽게 말하자면, 일반 소설을 쓰는 문체를 가지고 동화를 쓸 수는 없습니다. 또한 역사 소설을 쓴다면 재기발랄한 칙릿(chic-lit: 영어 chick+literature가 결합된 단어로, 젊은 여성을 겨냥한 영미권 소설들을 지칭하는 신조어-위키백과 출전:편집자주) 소설 같은 문체를 사용하는 것은 곤란하겠지요. 따라서 문체는 그 소설의 성격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입니다. 다만 작가가 모든 방면의 글을 쓰는 경우가,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드물어서 그런 변화를 쉽게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문체라는 것은 어휘와 수사법, 문장의 구조, 문장의 표현 방식에 따라 결정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소설과 SF는 선택하는 어휘가 완전히 다르죠. 로맨스 소설과 호러 소설은 수사법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긴박한 묘사가 중시되는 작품과 의식 내면의 흐름을 좇는 작품은 문장의 구조, 표현 방식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이것을 동일한 문체로 쓰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작가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같은 계통의 글이라 해도 읽을 때마다 동일한 어휘, 동일한 묘사, 동일한 문장이 반복된다면 그 후에는 그 작가의 글을 또 읽을지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작가의 일련의 작품 속에는 동일한 울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글이란 결국 반복된 훈련에 의해서 다듬어진 것이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서 새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어떤 소설이건, 소설은 시와는 달라서 그것을 읽었다고 해서 그 전체를 외운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고 난 뒤에는 그 소설이 준 감동, 느낌, 그리고 마음을 울린 독특한 문장만이 기억에 남죠.
나만의 문체를 가지는 방법
작가 지망생들 중에는 자기만의 문체를 찾기 위해서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독특하고 자기만이 쓸 수 있는 그런 문체를 갖고 싶어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어휘”입니다. 풍부한 어휘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고 있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애매한 부분이 조금이라도 남았다면 사전을 찾아보세요.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좋은 사전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역시 손에 잡히는 곳에 종이로 된 사전을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절한 곳에 적절한 단어 하나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뚜렷한 인상을 독자에게 남길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의 의미에 대한 여러 가지의 단어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들이 여러분의 문장을 풍부하게 만들어줄 것이고,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문체가 될 거니까요.
시 구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어요.
에서 ‘이름’이라는 말 대신에 ‘성명’을 넣는다면(박성룡 시인님, 죄송합니다),
풀잎은 퍽도 아름다운 성명을 가졌어요.
억지로 의미는 같다고 치더라도 당장 주민등록번호도 대야 할 것 같고, 무의식적으로 족보의 돌림자도 떠올라 시상의 흐름을 방해하지요. 더 무시무시한 것은 ‘ㄹ’, ‘ㅁ’같은 부드러움을 느끼게 하는 울림소리가 없어지면서 음률감은 완전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지요. 시를 예로 들었지만 소설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서술narration”과 “묘사description”의 적절한 조화입니다. 서술은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묘사는 이야기의 공간을 보여주지요. 이 두 가지는 적절하게 배합되어야 합니다. 하나만 등장해서는 안 되며, 그 둘이 교대로 균형을 잡아가면서 펼쳐져야 합니다. 의식의 흐름과 장면의 묘사와 대화와 혼자 생각 등이 자연스레 가로세로로 교차되는 옷감 짜듯이 고르게 배열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서술 : 나는 아버지를 따라 장으로 갔다. 아버지는 거기서 푸주칼 하나를 사주었다. 천하의 명검이었냐고?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석 달 만에 그 칼을 부러뜨렸고 아버지한테 죽도록 맞았다.
묘사 : 눈송이 하나하나를 검 끝으로 꿰어버리던 그 신묘한 검술을 생각한다. 재게 놀리는 발밑으로 눈이 녹으면 잘박잘박 소리가 났다. 진각을 구르면 흙탕물이 용천수마냥 솟아올랐지. (문영, <구도> 중에서)
위의 두 문장만 보면 같은 소설에 나오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문체가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이렇듯 서술을 중시하는가, 묘사를 중시하는가에 따라 문체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불필요한 표현의 제거입니다. 처음 만들어진 문장은 아직 매끈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프라모델과 비슷합니다. 사포를 들고 와서 삐죽삐죽 튀어나온 부분을 깎아내 버려야 합니다. 또한 불필요하게 덕지덕지 붙어 있는 장식물을 제거하고 이제 곱게 채색을 해주어야 합니다. 수동태 문장을 만들었다면 능동태로 바꿔 주세요. 읽는 사람에게 짜증만 부추기는 부사들을 과감하게 지워버려야 합니다. 한 문장에서 시간과 공간을 과도하게 집약시켜 놓았다면 분리해 버립시다. 가령,
그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다가 창밖에서 들이치는 비를 피하고자 창문을 닫았다.
이런 서술은 보기만 해도 끔찍하죠? 한 문장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동작(소파에서 일어나서 신문을 내려놓는)까지 포함하면 다섯 동작이나 들어가 있습니다. 저 문장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는 소설 안에서 그 행동이 얼마만한 비중이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까지 문체를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태준이 이미 간파한 것처럼 과거에는 시대가 문체를 결정했습니다. 연암 박지원이 새로운 문체를 찾아갈 때,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문체의 변화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시대를 역행한 행위였을 뿐입니다. 이제 현대에는 시대가 결정하고 있는 문체라는 것은 없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문체를 설명하기 더 어렵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향기 > 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10년 제10회 동서커피문학상 (0) | 2010.08.16 |
|---|---|
|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 (0) | 2010.07.22 |
| 2010년 신춘문예 시 당선작들 (0) | 2010.03.06 |
| 2010 경향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직선의 방식 (0) | 2010.03.06 |
| 2010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검은 구두 (0) | 2010.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