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문화

영화 코코 샤넬

연서화 티스토리 2009. 9. 4.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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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 샤넬 (Coco Before Chanel, 2009)

 

감독: 안느 퐁텐

출연: 오드리 토투, 알레산드로 니볼라, 베누아 포엘부르데, 마리 질랭

요약정보: 프랑스 / 드라마 / 2009.08.27 | 15세이상관람가 | 110분

 

 

줄거리

 

가수가 되고 싶고, 배우가 되고 싶었던 코코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그녀의 운명이 ‘샤넬’을 탄생시킨다.
가수를 꿈꾸며 카페에서 춤과 노래를 즐기던 재봉사 ‘샤넬’은 카페에서 만난 ‘에티엔 발장’을 통해 상류 사회를 접하게 된다.

코르셋으로 대표되는 화려함 속에 감춰진 상류사회 여성들의 불편한 의상에 반감을 가진 그녀는 움직임이 자유롭고 심플하면서

세련미 돋보이는 의상을 직접 제작하기에 나선다. 그러던 중, ‘샤넬’은 자신의 일생에서 유일한 사랑으로 기억되는 남자

‘아서 카펠’을 만나게 되고, 그녀만의 스타일을 전폭적으로 지지해 주는 그의 도움으로 자신만의 샵을 열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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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코 샤넬 - 위키 백과 

 

코코 샤넬(프랑스어: Coco chanel, 본명: 프랑스어: Gabrielle Bonheur Chanel, 1883년 8월 19일 ~ 1971년 1월 10일)은 

하우스 오브 샤넬의 설립자이다. 1883년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출생하였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세기의 연인들에

둘러싸여 독립적이면서 창조적인 삶을 살았다.

프랑스 남서부의 오벨뉴 지방의 소뮈르에서 태어난 샤넬은 12세에 모친이 사망하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버려져 고아원과

수도원을 전전하면서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코코>는 애칭으로 시골마을인 물랑에서 바느질공으로 고아원을 나온

샤넬은 당시 그녀를 후원한 한 장교에 의해 예능계에 재능을 각성하게 되었다.

가수를 지망하면서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그녀는 <Ko Ko Ri Ko> 와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라는

노래의 가사에서 자신의 예명인 <코코>를 이름 앞에 붙여 사용했다. 그 후 예능계의 길을 잠시 접고 당시 교제중이던

장교인 에튀엥느 발장에 의해 파리근교로 이주하여 사교계로 이용되던 발장의 목장에서 머물렀다.

여기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던 샤넬은 모자의 디자인에 영감을 받아 발장의 후원으로 1909년에 마르젤브 거리 160번지에

모자가게를 개업했다. 1910년에 파리의 캉봉거리 21번지에 <샤넬 모드>라는 모자 전문점을 개업한 샤넬은 이 때 발장과 헤어져

평생 연인으로 지낸 영국의 청년실업가인 아서 카펠과 교제를 시작했다. 샤넬 모드의 개업자금은 카펠의 후원이었다.

1913년에 드뷜에 2호점을 개설한 샤넬은 제 1차 세계대전 발발후인 1915년에 <메종 드 쿠튀르>를 오픈했다. 1916년 콜렉션을

발표해 대성공을 거둔 샤넬은 새로운 디자인과 소재로 화제가 되었었다.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자 카펠과

얼마동안 결혼했던 샤넬은 1919년에 카펠이 사고로 사망하자 다시 혼자가 되었다.

1921년, 본점을 캉봉 31번지로 확장한 샤넬은 조향사 에른스트 보와 함께 샤넬의 첫 향수인 <No.5>, <No. 22>를 발표했다.

이 때 극작가였던 장 콕토, 화가인 피카소, 작곡가인 스트라빈스키 등이 주최한 살롱에 출연한 샤넬은 사교계의 거물이 되었다.

당시 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샤넬은 이 초상화를 입수하지 못했다. 현재 초상화는 파리의

올랑쥴리 미술관에서 전시중이다.


1924년 이후 6년간 교제하던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만난 샤넬은 공작의 보석애호 취미에 의해 모조보석을 사용한

쥬얼리를 발표했다. 이 때 샤넬 슈트도 발표해 1934년부터 양산되기 시작했다. 이후 샤넬은 공작과 헤어져 여러 디자이너 및

유력자들과 사귀었는데 그녀들과 사귄 남자들은 모두 급사하거나 파산했다. 이에 샤넬은 불행한 사자자리의 숙명을 가진 여자라

불려지기도 했다.

1934년에 기업가로 순탄한 성장을 한 샤넬 브랜드는 악세사리 부문의 공장도 개설했다. 이듬해엔 양장 전문점도 오픈했다.

1939년엔 약 4천명의 직공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한 샤넬이었지만 당시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근로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샤넬은 이 충격으로 일부 점포를 제외하고는 사업을 접기로 해 일시 은퇴했다. 이후 15년간 샤넬은 프랑스의 패션계를 떠났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군에게 점령당하자 패전국 프랑스에선 친독계열의 비시 괴뢰정부가 들어섰다.

당시 프랑스인들 중에는 독일군에 대항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며 고문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자가 부지기수였는데 샤넬은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면서 그의 비호아래 타락적인 생활을 보냈다.

1944년 샤를르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군과 연합군이 프랑스를 해방하자 샤넬은 독일에 협력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고국을 탈출해 애인과 함께 전후 수년간 스위스의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보냈다. 이러한 경위로 현재도 샤넬은

<나치스에 혼을 팔아넘긴 매국노>라는 혐오감이 프랑스에선 강하다.

1954년에 스위스 망명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온 샤넬은 방도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릿츠 호텔에 거주하면서 패션계로의 복귀를

꾀했다. 샤넬의 2차대전 당시 언동에 강한 혐오감이 팽배해 있던 당시 유럽에선 그녀의 컴백을 막진 않았지만 <매국노>라는 경멸과

독일의 혐오감이 전쟁이 끝난 후 10여년간 샤넬의 발목을 잡아 위상이 약했지만 이와 반대로 미국에선 여성의 사회진출과 맞물려

그녀의 참신한 패션은 열광적인 선풍을 끌었다.

1955년 샤넬은 울 소재의 새로운 샤넬 슈트를 발표했는데 미국에선 <과거 50여년간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디자이너>로서

모드 오스카 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1971년, 거주하던 파리의 릿츠 호텔에서 콜렉션을 준비하던 샤넬은 87세로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협력한 혐의와 조국 프랑스를 배신한 행위에 의해 프랑스의 고급묘지에 묻히는 것을

거부당하여 어쩔 수 없이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의 로잔에 매장되었다.

디자이너로서의 샤넬은 코르셋을 많이 이용하던 1910~1920년대의 여성복에 대해 <왜 여자들은 쓸모없는 복장을 갖추어야 하나> 라고

회의를 느껴 당시 애인이던 웨스트민스터 공작의 고향이던 영국에서 신사복의 소재를 여성에게 적용해 스포티하고 심플한 디자인의

현대적 여성복인 <샤넬 슈트>를 만들어냈다.

한편 샤넬 자신은 생전에 이러한 주장을 한번도 밖에 내 보인적이 없었지만 샤넬의 사후에 <샤넬의 의상제작엔 일관되게 남자에

지배당하는 여성을 철저하게 배제하여 여자들의 마음을 해방시켰다>라고 선전되기도 했다. 이 선전은 그녀의 사후 일부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위장된 것이라고 밝혀지기도 했다.

또, 샤넬은 비교적 마른 체형이었기 때문에 모델로서 샤넬의 옷을 입은 그녀의 영향에 의해 지금도 패션모델이 되려면 마른 편이

아름답다는 고정관념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그녀는 지난 20세기 전반에 걸쳐 세계 패션의 흐름을 주도한 신화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몸을 꽉 조이던 코르색과 무거워 보이던

가식적인 헤어스타일 대신, 샤넬 스타일(Chanel style)이라는 독창적인 시그니쳐 룩을 선보였다.

샤넬의 대표적인 아이템인 핸드백은 어깨 끈을 사용함으로 처음으로 여성을 손으로 드는 불편함에서 해방시켰고, 저지 소재의

짧은 스커트과 기존의 남성복에서 영감을 얻은 스포티한 수트 등은 걷는 방식이나 움직이는 방식에 구애를 받던 20세기 초반의

여성들에게 새로운 자유를 부여했다.

그녀가 장식이 많은 옷 자체를 싫어했듯이, 당시 여성들에게 그런 스타일은 일종의 관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녀 고유의 복잡하지 않은 스타일의 져지 드레스, 승마 자켓, 스웨터 그리고 바지는 여성 해방을 위한 일종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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