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여행

신륵사 - 경기 여주군

연서화 티스토리 2008. 6. 9. 17:44

신륵사

 

 

 

 

 

 

 

 

로부터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신륵사 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 날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사라지니,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하였으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고 정성을 드리니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러나 이는 이곳에 절을 짓기가 어려웠던 사실을 전하는 전설일 뿐 정확한 문헌사료가 없어 창건의 유래를 확실히 알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또한 절 이름에 관한 유래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마암 馬岩 이란 바위 부근
에서 용마 龍馬 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설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高宗때 건너편 마을에 용마가 나타나 걷잡을 수 없이 사나우므로 이를 사람들이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이때 인당대사 印塘大師 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말이  순해졌으므로 신력으로 제압하였다하여 신력 神力 의 신" 神 " 과 제압의 뜻인 륵" 勒 "을 합쳐 신륵사 " 神勒寺 " 
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농경사회에서 용은 물의 변화신으로 여겨져 왔다. 이처럼 용과 관련된 설화는 신륵사가강가에  있음으로 해서 생겨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옛 선인들이 이 절을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이러한 설화가 생
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속에는 한국의 자생풍수에 따른 비보 裨補  적인 의미 역시 부여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려 때에는 신륵사 내 동대 東臺 위에 서 있는 전탑 때문에 벽절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신륵사>

 

 

 나옹화상과 신륵사

나옹선사가 일찍이 신륵사에 머물렀고,  훗날 다시 이곳에서 입적하므
로써 신륵사의 사세가 확장되었던 사실을 <고려사高麗史>에다음과 같
이 언급되어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1376년 양주 회암사 檜岩寺  중창
낙성식에 너무 많은 신도가   왕래하여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나옹에게
명을내려 밀양 영원사塋源寺로 이주하게 하였다.
이때 몸이 병든 나옹이 여주 신륵사에 이르러 입적入寂 하게 되니,그의
문도들은 신륵사에서 다비식을 하고 석종 石鐘 부도를 조성하여 나옹스님의 덕을 기리고자 하였다. 신륵사는 이를 계기로 대전大殿, 조당祖堂,
승당僧堂, 선당禪堂, 종루鐘樓, 동익당東翼堂, 서익당西翼堂, 남행랑南行
廊, 향적당香積堂 등의 많은 건물이 크게 중수重修되어 대사 찰의 면모
를 갖추었다.  이와같은 사세를 기반으로 신륵사는 고려불교를 개혁하고 중흥하는 중심도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대장경 봉안

나옹스님이 입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382년(고려 우왕 8년) 이색은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신
륵사에 2층으로 된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1부를 봉안하였다. 이듬해 이숭인(이숭인, 1349-1392)이
지은 <신륵사대장각비 神勒寺大藏閣碑> 비문에 의하면 목은 이색의 부친 가정 稼亭 이곡 李穀이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장경 한 벌을 인출해 내기를 서원하였는데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상총尙聰대선사가 목은에게 이 뜻을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에 목은 이색의 주선으로, 부친 이곡이 서원을 세운지 30년 만에 대장각을 짓고 대장경 봉인을
추진함으로써 이곡의 서원은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시작된 대장경 불사에는 각처에 산재해 있던 나옹의 문도들과 국가 원로 중신 및 권문세가들의 호응을 받아, 바로
나옹화상의 열반처인 신륵사에 대장각을 지어 봉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륵사 대장경 불사의 규모와 내용을 보면 어느 한 개인의 발원에 의해 이룩된 것이라기보다는 국가나 왕실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되며, 이러한 대규모의 불사를 거행할 수 있었던 고려시대 신륵사는 이미 왕실과 불교 중흥을 위한 중심도량으로서 역할을 담당하는 위치에 올라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 신륵사>

 

 

 
영릉英陵의 원찰願刹


고려말 나옹스님이 입적한 이후 사세가 확장되었던 신륵사 는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던 조선시대가 되면 서, 태종의 (1401년)에 의해 소장하고 있던 대장경을 일본에 보내야하는 등 배불정책으로 인해 사세 寺勢가 위축되었다. 세종 22년(1440년) 태종의 장인이었던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의 화상畵像 을 봉안하기 위해 중수된 신륵사는 7년 후 영릉英陵의 능침사찰陵寢寺刹이 되면서 다시 한번 큰 중창불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세조의 비妃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는 풍수지리상 지세가 불길하다고 하여 예종睿宗 원년(1469)에 서울 강남구 태모산 아래 태종의 헌릉 곁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게 하였다. 이에 세조의 유지를 받들어 원찰을 세우기로 하고 당세 권신權臣인 한명회와 한계희가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던 중 천년 고찰이라 알려진 신륵사를 택하여 추천하였다. 이에 따라 신륵사 내 옛 건물을 중수하기도 하고 새 건물을 건축하여 2백여 칸의 대가람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중심 전각을 극락보전으로 바꾼 뒤 사찰명을 보은사報恩寺라 하고 영릉의 원찰願刹로 삼았다. 이로부터 절은 사세가 더욱 확장되었고, 여주는 부에서 주로 승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현종顯宗 12년(1671년), 이조판서이던 김수항金壽恒과 이조참판 민정중閔鼎重, 호조판서 정치화鄭致和가 중심이 되어 임진, 병자란을 거치면서 폐허가 된 신륵사를 중창하고, 그 후부터는 다시 옛 이름을 찾아 신륵사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숙종肅宗 28년(1702)에는 오대산의 위학偉學, 천심天心, 우안宇眼 스님등이 시주하여 절을 중수하였으며 영조英祖 원년(1725)에는 법밀法密, 영순英淳 스님등이 전탑을 중수하였다. 그후로도 신륵사는 정조正祖20년(1796)에 공명승첩空名勝捷을 받아 범중루泛中樓 12칸과 좌우 식간食間을 신축하였으며, 철종哲宗9년(1858)에는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발원에 의하여 당시 호조판서 김병기金炳冀가 장불전藏佛殿, 선료禪療, 종루鐘樓, 향주香廚를 중수한 후 그 내용을 신륵사 중수기에 기록하였다.

 

 

 

*보물 180 - 신륵사조사당
(神勒寺組師堂)


신륵사의 서북편에 위치한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의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 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 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신륵사 조사당은 낮은 돌기단 위에 세운 정면 1칸, 측면 2칸의 특이한 구조를 지닌 건물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며 전면을 제외한 3면이 벽으로 마감되었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과 측면의 비례를 1.07:1로 구성하여 거의 정방형에 가깝고 건물내부에 기둥없이 천정을 모두 우물천정으로 짜서 조선초기 다포집 계통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1963년보물 제 180호로 지정된 지금의 건물은 양식면에서 조선 초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그 이후 많은 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은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진당시병서>에 의하면 고려 우왕5년(1397)에 진영당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조사당이 신륵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당 내부에는 중앙에 나옹, 그리고 좌우에 지공과 무학대사의 영정을 봉안해두고 있으며, 중앙 나옹화상의 영정 앞에는 목조로 된 나옹스님의 독존獨尊을 안치했다.

 

 

 

*보물 225 - 신륵사다층석탑
(神勒寺多層石塔)

신륵사 극락보전 앞에 있는 탑으로, 기단(基壇)을 2단으로 마련한 후, 그 위로 여러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각 부분의 세부적인 조형방법은 전혀 달라서, 기단에서부터 탑신부까지 전부 한 장씩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바닥돌 윗면에는 연꽃을 돌려 새겼다.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새겨진 기둥조각은 특이하게도 물결무늬를 돋을새김해 두어 눈길을 끈다. 아래층 기단의 맨윗돌을 두껍게 얹어놓아 탑의 안정감을 높이고 있으며, 위층 기단의 모서리에 꽃 모양을 새긴 기둥을 두고 각 면마다 용무늬를 깊이 판 모습은 능숙한 석공의 솜씨를 드러낸다. 탑신부의 각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얇은 한 단이며, 네 귀퉁이에서 가볍게 치켜올려져 있다. 8층 몸돌 위에 지붕돌 하나와 몸돌 일부분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층수가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이지만 8층 탑신의 아래까지만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각 부분 아래에 괴임을 둔 점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 양식을 일부분 남기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양식 등에서 고려 양식을 벗어나려는 여러가지 표현이 돋보인다. 하얀 대리석이 주는 질감은 탑을 한층 우아하게 보이게끔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원각사지십층석탑(국보 제2호)과 돌의 재질, 조각양식이 비슷하다. 신륵사는 조선 성종 3년(1472)에 대규모로 새 단장을 하였는데, 이 탑도 이 때에 함께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보물 228 - 신륵사보제존자석종
(神勒寺普濟尊者石鐘)
 

신륵사 뒷편에 모셔져 있는 나옹의 사리탑으로,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돌을 쌓아 넓게 만들고 앞쪽과 양 옆으로 계단을 두었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운 것으로, 나옹이 양주 회암사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으로 밀양에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니, 그 제자들이 절 뒤에 터를 마련하여 이 탑을 세워 두었다. 고려 후기의 석종형 부도 양식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보물 229 -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
(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제존자 나옹의 탑비이다. 보제존자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였던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문도들이 절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안치한 석종과 석비를 세워두었다. 비는 3단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겨 두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비몸은 양옆에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돌은 목조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비의 앞면에는 끝부분에 글을 지은 사람과 쓴 사람의 직함 및 이름에 대해 적고 있는데 글의 맨 앞에 적지 않는 것은 드문 예이다. 고려 우왕 5년(1379)에 세워진 비로,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글씨를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보물 230 - 신륵사대장각기비
(神勒寺大藏閣記碑)


대장각기비는 고려말 목은穆隱 이색李穡이 공민왕과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자 나옹의 문도와 함께 대장경을 인출하고 대장각을 지어 봉안한 사실을 기록한 비문이다. 비신碑身은 대리석으로 된 비문을 보호하기 위해 보제존자 석종비와 동일한 수법으로 둘레에 돌기둥을 세워놓고 있다. 비의 형태는 조형면에서 보제존자석종비 보다 훨씬 간략해져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지은 비문은 당시 직제학 권주權鑄가 쓴 자경 2㎝의 해서체로 탑신에 깨어진 부분이 많아 판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아쉽게도 비를 세운 연대 역시 탈락이 되어 그 시기를 정확히 밝힐 수는 없으나 대체로 보제존자석종비 제작4년 후인 홍무16년(1383년)으로 추정된다. 본래 신륵사에는 경, 률, 론 삼장을 인출하여 이를 수장하던 대장각이 극락보전 서쪽, 지금의 명부전 근처에 있었다고 전하나 아쉽게도 현재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고 다층전탑 위쪽으로 이 비만 남아 있다.

 

 

 

*보물 231 - 신륵사보제존자석종앞석등
(神勒寺普濟尊者石鐘앞石燈)

보제존자석종 바로 앞에 있는 석등은 석종부도를 장엄하기 위한 공양구供養具이다. 사찰에서 석등을 밝히는 이유는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無明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화강암이 주재료로 사용되었고, 화사석은 대리석재를 사용하여 조각이 용이하도록 하였다. 단순화되고 남성적인 느낌을 주는 석종형 부도에 비해 이 석등은 섬세하고 화려한 느낌을 풍기고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석등은 전형적인 8각형 석등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변형을 모색하여 화려하고 장식적인 면이 강조된 고려말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시도유형문화재 128 (경기) - 신륵사극락보전
(神勒寺極樂寶殿)

극락보전은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신 사찰의 중심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부처님으로 죽은 이의 극락왕생과 함께 중생들의 수명장수와 안락을 도와주시는 분이다. 신륵사가 관거 영릉의 기눙을 가진 전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글락보전 건물 전면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28호로 지정과 각주覺珠등의 스님이 주전각을 중창하였고 세종22년 (1440년)에 중수를 거쳐 영릉의 원찰이 된 후 극락보전이라 명명하고 성종 4년(1473년)에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고 한다. 경내 중심에 위치하고 정남향을 한 현재 이 극락보전의 건물은 정조21(179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800년에 완공된 것이다. 지금의 극락보전이 그 이전의 불전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겠는가에 대한여는 근거자료가 없어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위치와 규모, 그리고 건축형시에 있어서는 그 이전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다의 천전은 우물 천저이며 불단 위에는 정교하게 짜여진 닫집이 있고, 불단을 받치는 수미단의 단청은 안상 형식의 창 속에 학, 연꽃, 코끼리 등을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극락보전 내부 대들보에 나옹화상의 필적이라 구전되어 오는[천추만세千秋萬歲]라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홈페이지: http://www.silleuksa.org/ 

 

'삶의 향기 >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소산성- 충남 부여군  (0) 2008.06.15
고달사지 - 경기 여주군  (0) 2008.06.10
목아박물관 - 경기 여주군  (0) 2008.06.08
제10회 함평나비대축제 - 전남 함평군  (0) 2008.05.25
내소사 - 전북 부안군  (0) 2008.0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