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한국일보 신춘문예 - 시]
차창밖, 풍경 빈곳 / 정은기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있다, 양 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튿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옆,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출처]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작성자 까마귀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
엘리펀트맨
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당선소감] "희미하게 이정표를 본 기분"
털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가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십니다. 형아는 언제 오나, 형아 보고 싶어요, 아이쿠 추워라, 중얼중얼 노래하듯 유모차를 미십니다. 담요에 싸여 눈만 까맣게 내놓은 아기가 그 소리에 벙긋벙긋 웃습니다. 말랑말랑한 손가락을 내밉니다. 그 조그만 손가락 끝에 바람이 감기는 듯합니다.
당선 통보를 받던 날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습니다. 잠깐 지상구간을 달리는 지하철 창문으로 안개 너머 어렴풋하게 지붕들이 보였습니다. 저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이 안개를 뚫고 한참을 가야 하겠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일어나다가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직은 한참을 헤매어야 하겠구나 하며 지친 무릎에 힘을 주며 일어나려는데 희미하게 이정표를 본 기분이랄까요. 어리둥절해 앉아있다가 문득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단순한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 뒤섞인 설렘이었습니다.
시의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아직 한참을 더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그 길에서 거대하고 친절한 손가락이 튀어나와 이쪽, 이쪽 하면서 방향을 가르쳐줍니다. 그럼 이제 이 한 발짝이 다시 첫 발걸음이지요.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는 시의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매서운 바람에 손가락 발가락 끝이 다 얼어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이란 유모차를 밀고 형아는 언제 오나, 형아 보고 싶어요, 하고 노래 부르는 일이라 믿습니다. 마음을 바닥에 대고 마음으로 바닥을 밀면서 온몸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더 낮게 낮추었을 때, 그 밑바닥에는 연민이 있습니다. 핍진하고 고독하게 연민하는 자, 그 열렬한 사랑이 감히 시인일 것이라 말해봅니다.
이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모자란 시를 다독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곧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 없이 몸으로 보여주신 차창룡 선생님, 온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속되지 않고 진실한 시의 길을 일러주신 이경림 선생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애정으로 다독여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모든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나라에 있는 고독한 창틀에 기대어 오늘도 시를 꿈꾸는 뿌리 동인들께 이 기쁨을 돌립니다. 길모퉁이에서 만난 많은 도반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유미, 정화, 희경, 혜정, 너희들이 있어서 나는 언제나 행복하단다. 정직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동생 욱이가 있어서 저는 오늘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과 몸, 그 너머의 무엇까지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저 위대하고 사랑스런 자궁에게 눈물을 바칩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 이용임(李庸任)
1976년 경남 마산 출생
숙명여대 전산학과 및 동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현 ㈜핸디소프트 선임연구위원
[심사평] 기성 시단 상투성 벗어난 독특함 지녀
금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에 임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기대한 것은 무슨 특출난 개성의 출현이나 세련된 이미지의 조형 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양함이나 분방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한국 시단에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본심에 오른 작품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기량 면에서는 다 어느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나마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다음 두 응모자의 작품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합의했다. <흰목물새떼> 외 2편의 작품을 투고한 박현진씨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기량이 우선 믿음을 주었다. 묘사의 구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신산스런 삶의 한 귀퉁이를 포착해내는 눈길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투고작 가운데 <부황자국>은 여자의 몸을 공간 이미지를 빌어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엘리펀트맨> 외 4편을 투고한 이용임씨의 작품은 기성 시단의 상투형을 훌쩍 벗어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소시민의 일상을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가시적 지평을 넘어선 다른 세계를 현현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논란 끝에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엘리펀트맨>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모범답안 같은 안정감보다는 아직 미정형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응모자의 미래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도 섣부른 잠언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보다 긴장된 언어와의 싸움을 주문하고 싶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당부하고 싶다.
심사위원=김승희(시인ㆍ서강대 국문과 교수)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창과 교수)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시>
거미집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입가에 물집처럼 달이 뜬다
김두안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 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쫓겨가는
통제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심사평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 정직하게 읊어내”
심사위원들이 골라 온 작품은 모두11편이었다.
응모된 전체 작품 수를 고려하면 뜻밖에도 너무 적은 양이었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절차가 지닌 독특성이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즉 예심위원이 본심을 겸하는 만큼 아예 예심 단계에서부터 본심에 임하는 각오로 작품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어쨌든 11편을 두고 예심을 치러 아쉽지만 6편을 탈락시켰다.
이여명의 ‘돌을 쪼다’ 정철웅의 ‘철거민’ 이유훈의 ‘저수지에서 경전을 읽다’ 조인호의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 이연희의 ‘장독하나 묻어두고’ 김두루의 ‘얼룩말’이 그 작품들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박희진의 ‘햇쑥’은 인고의 계절을 딛고 선 초봄의 여린 햇살처럼 따스하고도 빛나는 서정성이 돋보였으나 작품을 구조적으로 맵시 있게 갈무리하는 솜씨가 다소 서툴러 보였고, 또 소품에 그치고 만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정지현의 ‘직선의 방정식의 일반형’은 곧고도 날렵한 음조를 지닌 의욕적인 목소리와 능란한 은유의 구사가 매력적이었지만, 아직은 저 수사가 소리의 의욕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보다 오랜 고민과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드린다.
배호남의 ‘고래꿈’은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된 작품이어서 오랜 습작과 훈련의 세월을 읽게 만들었다. 그 점은 함께 출품된 ‘사군자의 꿈’ 같은 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 한 편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심사위원들의 처지에서는 그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해보였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오선희의 ‘꽁치’로서, 구조적 완결성에 있어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실직 가장의 죽음과 구운 꽁치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삶의 엄숙함과 핍진함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되지 못한 데에는 그러므로 순전히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 작용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시길 각별히 당부 드린다.
당선작인 김두안의 ‘거미집’은 어떠한 과장된 수사나 현란한 말재간도 사양한 채, 차라리 어눌할 정도로 느껴지는 작고도 여린 목소리로 이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을 한 땀 한땀 정직하게 발음해내는 섬세한 내면 감각이 단연 돋보였다. 세상의 말들이 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시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었다.
함께 제출된 ‘입가에 물집처럼’도 저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높게 사 아울러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드린다.
심사위원 : 김기택, 황인숙, 김진수
당선소감
“좁고 판판한 들길이 절벽 같아”
김두안 시인
1965년 전남 신안 임자도 출생 임자중, 목포 영흥고 졸.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늦은 저녁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머리 속에 달 하나 뜬다. 뻘밭에 김 말뚝을 다 세우고 아버지와 나는 배를 밀어낸다 갯벌에 종아리를 박고 등으로 민다 섬 사이에 닻을 내린다 깍두기 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낚시줄을 던진다 환한 수면이 잔잔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달 속에 수수깡찌가 보인다 낚싯대가 휘어진다 배가 출렁거리고 달빛이 끈길 것 같이 팽팽하다 아버지의 가시등이 휘어오른다 달이 뽑힌다. 팔뚝만한 농어가 꿈벅꿈벅 아가미를 벌리고 허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고향 섬 임자도를 떠나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김포 들녘을 걷습니다. 별똥이 논둑으로 사라지고 군데군데 남아있는 눈이 은하수처럼 반짝입니다.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기러기 한 무리 소리없이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겨드랑이에 바람이 스밉니다.
나는 좁고 판판한 들길이 절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절벽을 기어오르는 희미한 달그림자를 봅니다. 나는 어딘가에 내 그림자 하나 버리러 갑니다. 아버지와 눈빛도 없이 살아가는 어머니 얼굴이 보입니다.
저에게 힘든 길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그리고 한국일보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김포 지인들에게도 오래 고개 숙입니다. "사람의 삶, 그 사이에 있고파" 전남 신안군 임자면 임자도(荏子島) 섬 소년은 문둥이가 산다던 배미골 너머 바다와 나란히 뻗은 20리 산길을 달려 마방촌 큰 아버지댁에 심부름을 다니곤 했다. 늦봄이면 외진 해변마다 피어나던 찔레꽃무리, 그 그늘에 앉아 바라보던 바다를 그는 기억한다고 했다. 5학년 때 그의 어린 동생이 숨진다. 뭍의 병원에서 석 달을 버티다 식어버린 동생을 포대기에 싸 업고 배에서 내린 엄마를 따라 걷던 조금사리의 갯벌둑…, 하얀 간(흙의 소금기)에 반사되던 그 날의 노을과, 엄마의 병원 냄새를 그는 기억한다고 했다.
20대의 그는 고향의 김 양식장과 염전을 등지고 상경해서는 공장 일을 했고, 운 좋게 장가를 들었고, 잠시 낙향했다가 다시 올라와 경기 김포에 눌러앉는다. “섬이 싫어 찾아온 도시지만 이 곳도 섬과 다를 바 없더군요. 김포는 그래도 바다와 들판이 있어 좋았어요.” 빈 들녘의 허전함과 고요가 좋다는그는 그 날 이래 지금껏, 한 해 최다 여섯 켤레의 구두를 작살낸 보험맨으로 살아왔다. 5년여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것도 그 박탈감과 허전함을 견디기 위해서라고 했다. “김포시가 연 ‘시민강좌’에서 함민복 시인을 만났어요. 그가 시인이라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죠.” 배워서 된 시인이 아니라, 겪어서 된 시인인 그는 그래서 유년의 바다와 염전, 김포 공단을 떠돌 때에도 이미 시인이었을 것이다. “유년의 추억과 가족, 자연,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삶을 잇는 시간과 공간 속의 길처럼 늘 그 사이에 있고 싶습니다.” 그런 그의 당선 소식에, 한 번 미치면 끝장을 보려 드는 그의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아내는, “갑갑하다”고 했다고 한다
200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견인지역 - 조정
병원 앞길이 소란했다
끌려가기를 거부한 여자를
용의주도하게 끌고 가는 남자처럼
견인차들이 줄줄이 차들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 많은 차들이 경고를 무시했다
여차하면 끌려가기 십상인 걸 알고도 모르는 척
적당히 거리를 잡거나
견디는 데까지 견디라는 말로 읽기도 했다
삼십 년을 견디어도 모자라는 셈이 있었다
이혼하는 날 아침에 쓰러져버린
남편의 엉덩이를 들고 기저귀를 갈며
여자는 한숨을 쉬었다
등 돌리는 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
이기게 되어 있다
되찾아온 차 운전석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내내
여자와 나는 구두 속에 든 발을 꼼지락거리며
벌금고지서를 읽었다
제 몫의 벌금을 내야 사는 일이 끝난다고 읽었다
벚나무는 연신 꽃을 떨어뜨려
땅에게 바치고 있었다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 - 조정
눈이 수평선을 지우고
바다가마우지 떼를 지우고 온다
소나무 숲을 지나 송림 슈퍼에서 뜨거운 커피를 산다
알루미늄캔 속에 출렁이는 바다
낡은 목도리를 두른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끊어진 길을 위해
낡은 자전거를 불태운다
딛고 올라가기에 인생만큼 부실한 사다리도 없다
많은 침묵을 풀어 물위에 내려놓은 사람들이 바다를 빠져나간다
굳이 떠나야만 했던 길을 되짚어 가는 동안
눈은 한정 없이 쏟아지고
출항을 포기한 집들은 문을 깊게 닫고 잠이 들 것이다
빈 탈의실이 문도 없이 떨고 서 있다
푸른 비치파라솔을 그려 넣은 옆구리에 한 사내가 오줌을 눈다
내가 그만 바다와 저 비굴한 기다림과
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다
빈 캔을 주머니에 넣고
운동화를 벗어 털면
병든 시계바늘이 쏟아진다
엇갈린 바늘처럼 비명을 지르는 시계가 발바닥에 고인다
제 때 제 곳으로 가지 못하는 발을 위해 나는 발목을 불태워 버린다
거대한 냉기가 모래를 헤치고 엎드려
손을 내민다
조금 더 내리고 말 눈이 아니다
바다가마우지가 바다를 통째로 삼키고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
바다가 큰 손으로 나를 구겨서 쥔다
이발소 그림처럼 - 조정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거울을 피해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친 식탁이 내 늑골 안으로 몸을 구부렸다
밤이 지나가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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