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문학

2008 {문화일보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 양장제본서 전기

연서화 티스토리 2009. 12. 6. 21:04

 

2008 {문화일보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양장제본서 전기

- 정

일러스트 = 이정학기자
시립도서관 정기간행물실의 삼면은 제본된 책들이 꽂힌 서가로 둘러싸여 있었다. 겹겹이 세워진 서가는 열람실 안쪽까지 깊숙이 뻗은 여러 개의 좁은 통로를 만들어 냈다. 난생 처음 도서관에 간 나는 어디에도 발을 들이지 못했다. 발을 잘못 들였다가는 길을 잃거나 마주치지 말아야 할 것과 맞닥뜨리게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 신문들은 감색 하드보드 표지로 제본되어 열람실 가장 깊숙한 벽면의 서가에 꽂혀 있었다. 내가 태어난 해에 발행된 신문을 찾아 서가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감색 표지는 점점 잿빛을 띠었고 신문의 명칭과 연도를 표시한 금박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남아있는 금박과 요철로 연도를 확인하며 통로를 따라 걸었다. 서가는 1988년 1월자에서 끝났다. 뒤편의 서가에는 다른 신문사에서 1987년에 발행한 신문들이 꽂혀 있었다. 이십 년도 안 된 신문들이 삭아가며 내뿜는 쿱쿱한 냄새에 취해 서가를 몇 바퀴 돌아보아도 1988년 이전의 신문을 찾을 수는 없었다.

출입문 옆쪽의 데스크 주변은 드나드는 사람들로 번잡했다. 사람들은 안쪽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거나, 젊은 남자 사서에게 노란 서류봉투를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남자 사서는 무언가를 묻는 사람들에게 대답을 하2느라 분주해 보였다. 그의 옆에는 희끗희끗한 단발머리의 여자 사서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코끝에 안경을 걸치고 책상에 이마가 닿을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붉은 표지의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언뜻 보면 조는 것 같기도 해 말을 걸 수가 없었다. 사람이 잠시 뜸해진 사이 남자에게 1983년에 발행된 신문의 위치를 물었다. 남자는 이십 년이 지난 신문들은 모두 지하 서고에 소장되어 있다며 마이크로필름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마이크로필름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자 어떤 신문이 필요하세요? 여기 이름과 주민번호를 적어 주세요.”

“83년 신문 전부 다 필요한데요. 찾아야 할 자료가 있어서요.”

너무 많은 신문을 요구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소일거리로 찾아보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다. 그는 열람실 한쪽에서 마이크로필름과 뷰어를 가져다 주었다.

“서류 배부 기간이라 오후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갈 테니 안쪽으로 들어가 앉아 주세요.”

열람실 안쪽은 입구와는 달리 한적했다. 길고 좁은 격자창문이 나 있는 동쪽 벽면에는 나지막한 잡지대가 비치되어 있었고, 그 앞에 여러 개 놓인 6인용 책상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앉아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있었다. 나는 평일 낮에 해가 잘 드는 도서관 창가에 앉아 잡지를 읽는 일이나 아주 높은 하이힐을 신고 사람이 없는 박물관 복도에서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걷는 일을 동경해왔다. 그 오랜 동경 탓이었는지 도서관에서 한가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가 났다. 그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는 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듯해 데스크 가까운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도서관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마이크로필름이라는 엉뚱한 물건을 들고 난감해 하며 1983년 1월1일자 신문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처음 한 일이었다.

신문은 세로쓰기가 되어 있어 사회면만 읽는데도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글씨를 오랫동안 들여다본 적이 없는 데다 도서관의 모든 게 낯설어 쉽게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데스크 뒤편에는 유리문이 달린 책장이 길게 놓여 있고 그 안에는 붉은 표지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남자 사서는 사람들에게 서류를 나눠주는 짬짬이 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맨 위 칸부터 책을 뽑아 운반용 카트에 차곡차곡 꽂았다. 붉은 벨벳 표지로 제본된 책의 옆면에는 사람 이름과 생몰년으로 보이는 숫자가 금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남자 사서의 움직임은 재빨랐지만 방문객을 상대하다 보니 책장 한 개를 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분주함 속에서도 여자 사서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폐관시간까지 두 달분의 신문도 다 읽지 못했다. 신생아 유기 사건을 다룬 기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필름을 돌려주는데 남자가 나눠주는 노란 서류봉투에 고딕체로 적힌 검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합법적으로 사라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무료 서비스.’ 왠지 모르게 구차한 기분이 드는 장황한 제목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무슨 서류인데 이렇게 받아 가는 사람이 많아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사라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무료 서비스 신청서예요. 이 년에 한 번씩 신청을 받는 건데, 여기서만 접수하는 거라 사람이 좀 많아요. 설명해 드릴까요?”

남자는 행동만큼이나 재빠르게 대답하며 데스크 뒷벽에 놓인 커다란 책장을 가리켰다.

“아니, 괜찮아요. 그냥 뭔가 해서요.”

남자는 리플릿을 한 장 건네주었다. 무료라는 말에 잠시 솔깃했지만, 사라진다거나 합법적이라는 단어 중 어느 것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대체 왜 세상에서 사라지려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가급적이면 살아서 내가 어디서 태어나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리플릿을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다.



엄마는 거실에 누워 있었다. 나는 엄마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고 밟고 지나칠 뻔했다. 그즈음 나는 가끔 그런 실수를 했다. 엄마는 술에 취해 있었고 바닥에는 포도주병이 뒹굴고 있었다. 3개월 할부로 구입했던 핑크빛 실크 블라우스 앞자락에는 포도주 얼룩이 붉게 배어 있었다.

“언니, 내가 저녁 차려 줄게. 돈 벌어 오느라 고생했어.”

엄마는 나를 죽은 이모로 착각했다. 잠 깬 엄마는 부산을 떨며 밥상을 차려왔다. 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찌개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자마자 뱉어냈다. 찌개는 시큼하게 상해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도 엄마는 싱글싱글 웃으며 병에 든 술을 입으로 가져갔다. 엄마의 웃는 얼굴이라면 신물이 났다. 엄마의 손에서 술을 빼앗아 개수대에 부었다. 그리고 냉장고에 남아 있는 술을 모두 찾아 꺼내 쏟아 붓자 엄마가 내게 달려들어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이게 다 네년 때문이야. 네년이 다 망쳤어.”

나는 엄마에게서 등을 돌린 채 싱크대를 붙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엄마는 숙인 내 머리와 등을 내리치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여러 번 다리를 발로 찼다. 엄마는 금세 힘이 빠져 내 어깨에 매달렸고 나는 엄마를 방으로 끌고 들어가 앉혔다. 엄마는 소리를 질러댔다.

“언니 왜 이래. 그 사람이 오면 가만둘 것 같아? 내가 이번엔 눈감아 줄 테니까 문 열어.”

엄마의 헝클어진 머리채를 잡아채고 싶다는 생각이 꾸역꾸역 밀려왔다. 나는 엄마의 방문을 꼭 닫고 손끝을 향해 밀려가는 생각을 간신히 삼켰다. 엄마는 문을 열고 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며 욕지거리를 했지만 나는 문에 등을 힘껏 기대고 서서 열어주지 않았다.

“어서 자. 자꾸 떠들지 말고.”

엄마는 문에 몇 번 몸을 부딪다가 금세 포기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문을 열자 엄마는 바닥에 가만히 누워 천장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조금 전의 일은 잊은 듯 헤헤 웃었다. 하지만 나를 알아보고 그러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눈이 피로한 탓에 누워 있는 엄마와 장판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엄마가 처음부터 나를 못 알아봤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아주 가끔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거나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 잊는 정도라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의사는 장기간의 음주로 인해 나타나는 기억력 장애라며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테니 초기에 입원 치료를 하라고 권유했다. 우리가 가진 돈은 월세 보증금뿐이었고 내가 받는 월급으로는 생활을 간신히 유지할 정도였기에 입원은 엄두도 못 냈다. 엄마는 자기 의지로 술을 끊을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고, 나는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당장 돈이 안 들어간다는 데 혹해 믿는 체했다. 그러나 엄마에게선 노력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얼마쯤 예상한 일이었기에 화가 나지도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점점 더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됐고,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어느 날 아침밥을 차려 주고 출근하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아가씨는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줘?’ 그 후 엄마는 두 번 다시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내게 언니, 아줌마, 아가씨 등등 여러 호칭을 붙여 주었다. 그리고 집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런 상황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나돌아다니지 않는 엄마 덕택에 생활비가 삼분의 일만큼 줄었다. 엄마가 12개월 할부로 구입한 모피코트 말고는 카드대금이 더 이상 청구되지 않았기에 나는 처음으로 저축을 시작했다.

엄마가 외상으로 받아 온 술값 정도는 그동안 엄마가 쓴 것에 비하면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월세와 약간의 생활비를 뺀 나머지 돈을 일 년 정도 저축해 목돈을 조금 모은 뒤 직장을 그만두었다.

일을 했던 건 노동의 기쁨이나 자아성취 같은 거창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내가 벌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혼 후 엄마는 집안에 틀어박혀 술만 마셨다. 그러다가 한 번 나가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빌린 돈으로 생활을 해야 했음에도 엄마의 씀씀이는 점점 커졌다. 결국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아빠가 양육비로 남긴 이십 평짜리 주공아파트를 팔아 빚을 청산했다. 나를 버리지 않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엄마는 내게 관심이 없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자주 굶었고, 방학 동안에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는 나를 딱하게 여긴 선생님의 추천으로 장학금을 주는 여자실업고등학교 야간반에 진학했다.

낮에는 남자고등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방학 동안에는 갈비집에서 음식을 날랐다. 나를 남자아이들은 빵순이라고 불렀고 주방 아줌마들은 막내라고 불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변두리 공단지역에 있는 중소 의류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전산작업을 하고 복사를 하고 커피를 타는 김양으로 육 년을 보냈다. 사흘에 한 번꼴로 야근을 하고 일주일에 한 번 철야를 하며 창고의 재고를 체크했다. 월급만으로 부족할 때가 많았기에 주말에는 예식장 도우미 아르바이트를 했다.

‘네가 돈을 벌어다 줘서 너무 기뻐. 힘들어도 어떡하겠니. 이만큼 키워준 보답은 해야 사람이지.’ 내가 돈을 벌자 엄마는 관심을 보였다. 월급날이면 밥도 지어주고 퉁퉁 부은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월급은 모두 엄마의 카드 대금과 생활비 명목으로 쓰는 용돈으로 들어갔다. 내 수중에 남는 돈은 거의 없었고 생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월급날이 가장 즐거웠다. 아빠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편지를 보내오던 시절만큼이나 행복했다. 엄마가 기억을 잃자 경제적 고통이 사라진 동시에 한 달에 한 번 찾아오던 알량한 행복도 함께 사라졌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엄마를 위해 더는 돈을 벌고 싶지 않았다. 육 년 동안 결근이나 조퇴 없이 열심히 일했던 내가 예고도 없이 사직서를 내자, 상사도 직원들도 그만두는 이유를 슬쩍 물어 볼 뿐 붙잡으려 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복권이 당첨되기라도 했느냐, 시집을 가게 된 거냐 하면서 새로운 인생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며 내 앞날의 행운을 빌어 주었다. 나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은 고사하고, 그 낡아빠진 인생을 어찌하면 좋을지도 알지 못했다.



출근할 때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나 천천히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아무리 늑장을 부리며 걸어가도 열람시간까지는 삼십 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도서관 정원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와 캔커피로 아침을 때우며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짊어지고 지나가는 늙수그레한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다 떠지지 않은 눈은 통근 버스 안에서 선 채로 잠들던 사람들의 눈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사서들은 8시40분쯤 출근을 했고 9시가 못 돼 열람실 문을 열어 놓았다. 나는 1983년의 마이크로필름과 뷰어를 빌려 도서관 안쪽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이른 시간, 무서울 정도로 조용한 그곳에 혼자 앉아 있자니 세상에 혼자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을 몰아내기 위해 마이크로필름을 읽는 일에 몰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로쓰기에도 익숙해지고 헤드라인과 기사 첫머리만 읽으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닷새 만에 일 년분의 신문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내가 본 신문 어디에도 신생아 유기 사건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 기사가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한 마음만 커졌다. 1983년에 다른 신문사에서 발행한 신문까지 읽기 시작했다. 거기서도 발견하지 못한다면 1982년에 발행된 신문들까지 찾아 읽을 생각이었다. 일이 복잡하게 된 건 엄마 때문이었다. 내 주민번호는 83으로 시작하지만 엄마는 자기 편의에 따라 내가 태어난 해를 82년이라고 했다가 83년이라고도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엄마의 말을 지적하면 엄마는 화를 냈다. ‘아, 몰라 몰라.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엄마가 거짓말을 하는 건지 기억을 못하는 건지 나로서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도서관이 익숙해질 무렵 두 사서들은 매일 가장 먼저 찾아와 마이크로필름을 빌리는 내게 알은체를 했다. 정기간행물실에 나처럼 오랫동안 한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수가 서류를 받으러 방문하는 사람이었고, 열람자들은 신문이나 잡지를 읽다가 금세 자리를 떴다. 남자 사서는 서류를 받으러 온 사람들의 질문에 답하며 책을 정리하느라 계속 바빴지만, 대조적으로 여자 사서는 한가해 보였다. 붉은 표지의 책만 계속 읽다가 가끔 컴퓨터에 무언가를 입력하는 일이 다였다. 폐관 시간이 다가오고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남자 사서는 화장실에 다녀오는 내게 커피를 한 잔 건넸다. 여자 사서는 내게 날마다 신문을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는 이유가 무언지 물었다. 대답을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닌 듯해 그저 기사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이 나를 도울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제 일이 여기에 제본된 것들의 내용을 기억하는 거예요. 예전엔 신문이나 잡지의 내용까지도 담당했는데 그건 이제 컴퓨터가 하고, 지금은 저 양장제본서의 내용들만 기억해요. 뭐, 비인간적인 처사에 대한 인간적인 뭐라나…. 여하튼, 98년 이전의 신문 기사는 모두 기억하고 있으니까 도울 수 있을 거예요.”

“그 많은 사건들을 어떻게 기억하세요? 자기 식구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게 가능한가요?”

“그럼요. 그게 내 일인 걸. 사실 일어나는 사건의 종류는 몇 가지 안 돼요. 시간, 장소, 사람만 바뀔 뿐이지 다 똑같은 일들의 반복이니까 별거 아니지요. 사실 나도 가끔 내 이름이나 전화번호를 깜빡깜빡하는 사람인데요 뭐. 자식 이름도 까먹곤 한다니까.”

우리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아무도 없는 열람실의 서가 속으로 퍼져 들어갔다. 나는 마치 도서관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에 마음이 울컥했다.

“혹시 82년이나 83년에 있었던 신생아 유기 사건을 알고 계세요?”

그녀는 아주 잠깐 심호흡을 하더니 단호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런 사건은 없었어요. 신생아 유기 사건이 처음 등장한 게 88년이에요. 90년대엔 공중변소나 물품 보관함, 쓰레기 하치장 같은 곳에 버려지는 애들이 많았어요. 하지만 80년대 초반이라면 분명히 없어요. 찾아봐도 안 나올 거예요.”

찾는 까닭을 캐묻지 않는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녀의 기억력을 믿을 수 없었다. 그 후 며칠간 83년에 발행된 신문의 마이크로필름을 빌려 기사를 찾아보았지만, 그녀의 말처럼 신생아 유기 사건에 대한 기사를 찾을 수 없었다.

1983년 혹은 82년, 그때 아직 나는 태어나지 않았다. 여인숙이 즐비한 뒷골목, 쓰레기 봉지의 터져 나간 부분으로 비둘기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내 친어머니, 그때에는 누군가의 딸이기만 했던 소녀는 골목에서 풍기는 시큼한 냄새에 헛구역질을 하면서 제 또래의 여고생에게서 빼앗은 흰 농구화에 쓰레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튈까 깨금발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소화가 안 돼 정말 미치겠어.’ 삼십 분 간격으로 칭얼대는 소녀 때문에 잠을 설친 내 아버지일지 모르는 남자 중의 하나는 약국이나 가보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고, 동이 트자마자 소녀는 여인숙 근처 약국을 찾았다. 소녀는 내가 잉태된 줄도 모르고 훼스탈 두 알을 활명수와 함께 털어 넣었다. 그러고도 속이 편치 않자 끼니때마다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소화되지 않았고, 기어이 태어났다. 그리고 곧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몸에 더러운 휴지가 덕지덕지 붙은 채 발견되었을 때, 나는 용케도 살아 있었다. 의사가 궁둥이를 아무리 때려도 눈을 꼭 감은 채로 울지 않았다. 눈물을 아낀 나의 탄생은 다음 일자 조간신문의 사회면에 기록되었다.

이것이 엄마가 말해준 내 출생의 전모였다. 아빠가 집을 나간 뒤, 밤이면 엄마는 팔베개를 해주고 동화를 읽듯 옛날이야기를 해 주었다. 엄마는 한 불량한 소녀의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 소녀의 이야기에 점점 살을 붙였다. 나는 그 이야기가 무서워 듣고 싶지 않았지만 엄마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빠가 잠시 돌아와 짐을 싸들고 우리 곁을 영영 떠나던 날 엄마의 이야기는 완성되었다. 엄마는 무릎을 베고 누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네 엄마 이야기야. 나는 네 친엄마가 아니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널 데리고 오지 않는 건데.’

엄마의 손이 머리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나는 엄마의 이야기를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도 않았으면서도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지?’하며 되물었다. 내 물음이 울음으로 바뀌고, 그 울음이 멈출 때까지도 엄마는 아무 대답 없이 내 머리만 쓰다듬었다. 흐느낌이 완전히 멈추고 나자 그녀는 내게 대답했다.

‘거짓말이라면 얼마나 좋겠니.’

그리고 나를 향해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었다. 그날 이후 나는 울지 않게 되었다. 다만 어쩐지 화장실이 편안하게 느껴졌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결국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했고, 엄마는 더 이상 내게 팔베개도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엄마의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게 사실인지 굳이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중학교에 진학할 때 제출했던 주민등록초본에는 내가 아빠의 친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만 믿기로 했다. 아빠가 나를 데리고 가주기를 바랐지만 아빠는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았다.



집에는 온통 불이 켜져 있고 텔레비전도 켜져 있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피로한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 엄마는 안방의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아이비 덩굴이 수놓인 엄마의 티셔츠는 벽지의 문양 사이에 파묻혀 있었고 엄마의 얼굴은 오래된 벽지처럼 누렇게 찌들어 있었다. 밤이 되자 엄마는 내 방으로 건너와 내 옆에 누웠다.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내 옆을 파고들었다.

“엄마, 영지는 83년에 태어난 게 맞아?”

엄마는 눈을 위로 치뜨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음… 영지…, 가만있자… 그게 누군데? 근데 말이야, 대경씨는 언제 와?”

엄마가 붉은 양장제본서가 되어 도서관 책장에 꽂히는 것을 떠올렸다. ‘합법적’이라는 말이 왜 쓰였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오늘은 당신 남편 생일이라 부인하고 아들하고 저녁을 먹었어. 아들이 벌써 고등학생인데, 지 아빠 판박이더라니까.”

엄마는 일어나 앉더니 내 뺨을 철썩 내리쳤다.

“다 언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그 사람 돌아오기 전에 우리 집에서 나가.”

나는 못들은 척하고 말했다.

“사우디에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돌아와? 기억 못하나 본데, 철골에 깔려 죽었어. 절대 안 돌아와. 바보같이 그걸 몰랐구나.”

나는 거리낌 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내 자신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앞뒤도 맞지 않는 거짓말에 엄마는 마치 아빠가 죽은 것처럼 슬퍼했다. 아빠에 대한 엄마의 이상스러운 집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 아빠 잘못이 아니야.’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나는 수긍할 수 없었다. 우리를 버린 건 아빠였으니까.

내가 아빠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중학교의 첫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엄마가 집을 오래 비워 빈집에서 홀로 생활하는 날이 많았다. ‘엄마, 학교에 보충수업비도 내야 하고 쌀도 떨어졌어. 이거 들으면 꼭 전화해 줘.’ 호출기에 아무리 녹음을 해도 엄마는 답하지 않았고 며칠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점심으로 이백 원짜리 옥수수빵을 사 먹고 저녁엔 백 원짜리 우리집라면을 끓여 먹었다. 주머니엔 회수권 밖에 남지 않았다. 도움을 줄 친척도 없었고, 자주 이사를 다녀 아는 이웃도 없었기에 아빠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새카맸던 아빠의 얼굴은 뽀얗게 변했지만 나는 쉽게 알아보았다. 아빠는 손을 흔드는 나를 처음 보는 사람인 양 유심히 살폈다. ‘이런, 너무 자라서 못 알아봤네.’ 아빠는 초코우유에 빨대를 꽂아 주고 벤치에 앉았다. ‘나한테는 널 부양할 법적인 책임이 전혀 없어. 양육비도 다 줬거든. 더 도움을 못 줘서 미안하구나. 너한테 지금 돈을 좀 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그건 좋지 않은 습관을 들이는 거야.’ 내겐 좋은 습관보다 푼돈이 중요하다는 걸 아빠가 알 리 없었다. 난처한 표정의 아빠에게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집으로 오는 버스를 서둘러 탔다. 고맙게도 아빠는 버스가 떠날 때까지 제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감동 받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쓸데없이 써버린 회수권 두 장과 함께 아빠를 버렸다. 회수권 쪽이 조금 더 아까웠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서는 엄마에게 나는 다짜고짜 말했다. ‘아빠는 개아들놈이야.’ 엄마는 들고 들어온 쇼핑백을 내팽개치고 청소기 연장 봉을 뽑아 내 엉덩이를 때렸다. ‘버르장머리 없는 년, 근본도 모르는 년.’ 엄마는 개처럼 으르렁댔다. ‘아빠는 개아들놈이야. 내 입이 더러워질까봐 개새끼라곤 말 안 해.’ 나는 더 크게 말했다. 때리다 지친 엄마는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아빠를 만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빠는 잘못이 없어. 다 우리 탓이야.’ 나는 나까지 끌어들이는 엄마에게 몹시 화가 났다. 엄마는 백화점 쇼핑백에서 내 옷 몇 벌과 그땐 필요도 없었던 체크무늬 브래지어를 꺼냈다. ‘교복을 입어서 옷은 필요 없는데.’ 나는 엄마에게 보충수업비를 달라고 했다. ‘어머, 미안해. 돈은 없어.’ 엄마가 정말 미안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마이크로필름 두 장과 얇은 영화 주간지 한 권을 꺼내 들고 정기간행물실 안쪽 창가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마이크로필름만 보면 마음이 갑갑해졌지만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서가의 통로 깊숙한 곳까지 미끄러져 들어가는 햇빛의 움직임에 눈을 고정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통로로 몰려가는 공기의 흐름과 종이 삭아 가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간질였다. 도서관은 내가 머물렀던 어느 곳보다도 편안해, 세상에 혼자 남겨질 거라면 그 자리에 남겨져 영원히 아무에게도 발견되고 싶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남자 사서에게서 서비스 신청서를 한 부 받아 넣으며 물었다.

“이건 죽는 것과는 다른 거겠지요?”

“그럼요. 고달픈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죽는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자살도우미니 증발브로커니 하는 범법자들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이 서비스는 개인의 기억을 추출해내 양장제본서로 남겨 주는 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추출된 기억은 표지 속의 칩에 이식되고, 동시에 책으로 기록되어 허가한 대상에 한해 열람이 가능하게 되죠. 몸은 사라지지만 정신은 제본된 기억 속에 머물게 되는 거지요. 예전에는 기술 부족으로 기억을 모두 남겼는데 2001년부터는 머물고자 하는 기억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도서관에서는 그 기억의 내용까지 데이터베이스화해서 영원히 보존해 주고요. 정부에서는 이것만 합법화했습니다. 기업에서 하는 유사한 처방들은 사실 다 불법이에요.”

그는 자동응답기처럼 능숙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즉흥적인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라고 했다. 신청을 해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통과하지만, 그래도 20대 이하가 통과될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으니 큰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다.



엄마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나는 도서관과 집만을 오갔기에 생활비가 거의 들지 않았다. 퇴직금이 다 떨어지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려고 했지만 그 상태라면 한동안은 문제없을 듯했다. 식사를 좀 하라는 내 말에 엄마는 그냥 놔두라며 날뛰었다. 엄마는 많이 쇠약해져서 나를 때려도 전혀 아프지 않았다.

“잘 됐네. 남편은 당신이 굶어 죽길 바라던데.”

나는 그런 말을 일상적으로 내뱉었고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거짓말이지? 그렇지?”

엄마는 눈을 번득이며 내게 달려들었다.

“거짓말이라면 얼마나 좋겠어.”

나는 엄마를 향해 활짝 웃었다. 엄마는 내게 매달리며 훌쩍거렸다.

“자꾸 울지 말고, 나를 좀 기억해 봐. 그러면 그만둘게.”

나는 엄마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끝내 엄마는 나를 단 한순간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가져온 서류의 신청인 란에 엄마의 이름을 써넣었다. 서류에는 신청인의 일대기, 신청 이유, 남기고 싶은 기억을 써넣는 공란이 있었다. 그것을 채워 넣는 것이 엄마가 나를 기억하게 하는 일보다 쉬울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도 엄마를 점점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 나는 벽과 엄마를, 장판과 엄마를 구분하지 못했다. 가끔 누워있는 엄마의 다리를 밟거나 머리카락을 밟았다. 밟고서도 밟은 줄을 모르고 지나쳤다. 엄마는 집안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지만 어느 곳에서나 나타났다. 엄마는 잠든 내 머리를 슬며시 쓰다듬으며 내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는 외롭고 쓸쓸하게 늙어갈 거야. 나도 곧 너를 떠날 거고, 아무도 너를 쳐다봐 주지 않을 거야.”

귀를 막아도 엄마는 알아듣지 못할 말로 속삭였다. 나는 견디다 못해 엄마를 집에서 끌어내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엄마는 손에서 빠져나가 집의 어딘가로 스며들었다. 눈에 띄면 잡아보려고 안간힘을 써 봐도 엄마를 잡을 수 없었다. 엄마는 쉽게 내 눈에 띄지 않았다. 서류 신청 마감이 가까워오고 있었지만 나는 서류의 빈칸을 하나도 채워 넣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내 손에 몇 차례 잡혀 실랑이를 벌였던 엄마는 더 이상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는 엄마를 제본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고, 무의미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또 버려졌고, 출생 또한 미궁 속에 빠진 채 그대로 멈춰 있었다. 그것은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었으므로 슬프지는 않았고, 견딜 수 없이 지겨웠을 뿐이다.



나는 간단하게 짐을 챙겼다.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엄마를 위해서라면 월세도, 생활비도 한 푼 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엄마의 호적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명의로 빌린 집도 아니니 주인이 찾더라도 모르는 일이라고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다. 장롱에서 우표수집책과 앨범을 꺼내 가방에 넣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엄마는 부엌 벽에서 튀어 나와 내 가방을 붙잡고 늘어졌다. 자꾸만 가방으로 달려드는 엄마를 밀쳐내고 집에서 빠져나왔다. 우표수집책과 앨범은 나에게도 행복한 날들이 있었다는 증거물이었으므로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아빠와 전화통화를 할 수 있게 된 무렵부터 아빠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편지를 보냈다. 엄마가 읽어 주던 편지는 늘 사랑한다는 문장으로 끝났다. 아빠는 글을 못 읽는 나를 위해 사진을 동봉했다. 하늘이나 사막, 시장 풍경이나 아빠의 숙소가 찍힌 사진을 앨범에 소중하게 붙였다. 엄마는 아빠가 사진작가가 될 거라고 말했다. 엄마가 편지봉투에 밥솥의 김을 쐬어 우표를 감쪽같이 떼어내면, 나는 우표를 우표수집책에 끼워 넣었다. 항만이나 오아시스 혹은 유적을 배경으로 콧수염을 기르고 하얀 구트라를 뒤집어 쓴 왕의 얼굴이 그려진 우표는 점점 늘어갔다. 나는 왕의 콧수염이 보기 싫어 아빠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랐다. 잠시 들른 아빠는 우리에게 니콘카메라를 사주었다. 나는 캐러멜처럼 검게 반짝이는 아빠의 얼굴이 낯설고 무서워 사진을 찍지 않으려고 도망 다녔다. 아빠가 돌아가면 다시 아빠를 그리워했다. 엄마는 밤이면 편지를 읽어 주거나 아빠가 주인공인 아라비안나이트를 들려주었다. 맑은 날에는 마당이나 놀이터, 방안에서 사진을 찍어 아빠에게 보냈고, 남은 사진을 앨범에 끼워 넣고 날짜를 써 넣었다. 초등학생이 되던 해 아빠는 영구 귀국했다. 아빠가 찍은 사진을 더 모을 수 없는 것과 잠자리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게 아쉬웠지만 나는 아빠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그날 밤부터 엄마는 내 귀에 무서운 소녀의 이야기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집을 나와 서울 중심에 있는 본적지를 찾아가 호적등본을 뗐다. 나는 여전히 아빠의 딸로 기록되어 있었고 호적에 나 말고는 아무도 들어있지 않았다. 아빠의 집을 찾는 데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는 시의 외곽에 있는 동네에서 작은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미적거리며 사진관과 버스 정류장 사이를 여러 번 오갔다.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앞머리가 갓 벗겨지기 시작한 깡마른 남자가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는 내가 필름을 찾으러 간 손님인 줄 알았는지 이름을 물었다. 내 이름을 말하자 그는 놀란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고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 영지구나. 영 다른 사람 같아 못 알아봤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혹시라도 보고 싶어 찾아갔다거나, 내가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돈이 필요해 찾아간 것으로 오해할까 싶어 계획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놀라실지도 모르지만, 엄마가 집이 돼버렸어요.”

“요즘 같은 세상엔 책상이 되기도 하고, 신발장이 되기도 하고, 이름조차 안 남고 완전히 사라지는 사람들도 허다한데 그런 것에 비하면 네 엄마는 괜찮은 편 아니냐?”

그는 내게 의자와 찬 음료를 내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런 태도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그렇게까지 미워할 필요가 있어요? 헤어진 지도 오래됐는데.”

“너는 딴생각 하지 말고, 잘 봐. 집 어딘가에 그냥 숨어서 집이 된 척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단 말이지. 그 정도 거짓말쯤은 거뜬히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저도 엄마의 거짓말이 지겨운 사람이에요. 하지만, 설마, 그런 걸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설마 하다가 속는 거다. 나는 뭐 바보라서 속았겠니? 애를 가졌다고 결혼까지 한 여자야.”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입양을 했을 거라고 혼자 추측했던 것과는 달리 엄마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조금 희망적이었다. 나는 마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때 그 아이가 나라는 백 퍼센트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저도 알아요. 그런데 무얼 속으셨다는 건지….”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애를 배지도 않은 여자가 어떻게 애를 낳아. 배부르기도 전에 사우디로 떠밀 때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어쨌건 나는 돈 부치느라 사막에서 청춘을 다 보내고 인생 종쳤잖냐. 너도 들어서 알고 있을 거 아니냐?”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빠는 빈 필름 통을 만지작거리며 내 얼굴을 간간이 쳐다보았다.

“중요한 건 아닌데,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저는, 어떻게 된 거예요?”

“글쎄 모르겠다. 오래돼서 기억이 안 나. 엄마나 이모한테 물어보는 게 빠를 거다. 어쨌든 너는 내 핏줄이 아니야.”

이모는 이미 죽었고 엄마는 집이 되었으니 더는 물어볼 곳도 없었다. 난 그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그가 꾸며 낸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나로서는 아빠가 정직한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아빠와 같은 핏줄이 아니라는 말을 들으니 이리저리 엉켜버린 끈을 툭 잘라 내버린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제 의지와는 관계없었던 일이지만, 인생을 망쳐드려, 죄송해요.”

그의 옹졸함이 마음에 걸려 진심으로 미안하지는 않았지만 사과하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러자 그는 당황한 듯 크게 손사래를 쳤다.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런 소리는 하지 마라. 지금 이렇게 사진관이라도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그래도 사우디에 있을 때 너 때문에 견딜 수 있었는데……. 미안하다.”

그는 애꿎은 필름 통만 찌그러뜨리며 바닥을 한참 내려다보더니 증명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냥 가겠다고 했지만 그는 조명을 켜고 기어이 나를 스튜디오 의자에 앉혔다. 나는 정면을 보며 억지웃음을 살짝 지었고 그는 내 표정이 좋다며 셔터를 여러 번 눌렀다. 터지는 플래시에 눈이 시큰거렸다. 그는 며칠 후에 사진을 가지러 꼭 들르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내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나는 세상에서 합법적으로 사라지기로 했다. 여기 있으나 없으나 매한가지라면 사라지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신청 서류를 작성하는 데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일대기를 쓰는 부분을 먼저 메워 나갔다. 쓰다 보니 내 삶이 그다지 불행하지도 않았고 너무 평이해서 탈락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쓰레기통에서의 출생을 끼워 넣었다. 그 일은 왠지 내가 기억하는 일들보다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제본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해 몇 가지가 생각났지만 공란에는 경제적 이유라고 간단하게 적었다. 마지막 공란의 남기고 싶은 기억을 선택하는 게 가장 어려웠다. 가능하면 행복한 기억 속에 머물고 싶었다. 그런 순간을 떠올려 봤지만, 그것은 나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도화선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기억의 대부분을 삭제하고 도서관 창가에 앉아 보낸 시간만을 남기기로 했다. 서류를 작성하는 일주일 동안 마치 오래 전부터 제본되기를 꿈꿔 온 사람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나는 마지막 날 마감시간에 맞춰 신청을 마쳤다.

남자 사서는 삼천 명이 넘는 사람이 신청서를 받아갔지만 신청자는 이천 명쯤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이틀 후 신문에 이 서비스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이 서비스에 대한 찬반론이나 사회학적 분석 같은 긴 글이 실렸다. 나는 신청자 통계만을 눈여겨보았다. 실직자나 노숙자가 IMF때보다도 많았고 늘 그래왔듯 실연을 당하거나 배우자를 잃은 사람, 사는 게 이유 없이 싫다는 청소년들도 다수였다. 다른 해와 다른 건 칠십대 이상의 노인이나 삼십대 초반의 취업 실패자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이었다. 의외로 시한부 환자들이나 장애인이 신청을 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격이 턱없이 부족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탈락하면 다시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기에 초조했다. 떨어진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매일 도서관 정기간행물실 구석, 정원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며 발표를 기다렸다. 1차 서류 전형 합격자는 사흘 만에 발표가 났다. 서류상의 부적격자만을 추려 내는 일이라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중 삼분의 이가 1차 서류 전형에 통과했다. 나도 합격자 명단에 끼어 있었다. 서류 심사에 통과한 사람들 중 이십대는 백 명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서류 심사에서 탈락했다. 그들이 살아있을 경우의 기회비용이 사라질 경우에 발생하는 손실보다 더 크다는 이유였다. 1차 합격자들의 신원조회를 하는 데 닷새가 더 걸렸고, 그 과정에서 전체의 삼분의 일 정도가 탈락되었다. 부도를 내고 도피하려는 사람이나 막대한 빚을 진 사람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는 유형과 작성한 서류의 내용과 실질적 내용이 전혀 달라 범죄 이용 가능성의 의혹이 있는 유형이었다. 최종적으로 팔백 여 명이 남았고 나는 그중 221번째였다. 하루에 삼십 명씩 제본이 진행된다는 공고가 붙었다. 나는 여드레째 날의 명단에 들어가 있었다.

최종 발표가 있었던 날 나는 잠시 집에 들렀다. 엄마가 보고 싶다거나 집에 미련이 있어서 갔던 것은 아니다. 현관은 굳게 잠긴 채 열리지 않았다. 골목을 향해 나 있는 창문을 겨우 열어 들고 나왔던 앨범과 우표수집책을 집안으로 던져 넣은 뒤 옆집 대문 앞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얼마 후 창문이 슬그머니 닫히더니 집이 조금씩 흐느끼듯 진동하는 것 같았다. 집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지만 나는 엄마가 이미 집이 되었으리라 짐작했다.

제본될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도서관과 찜질방을 오갔다. 작별인사를 할 사람을 생각해 봐도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우리 막내’라고 부르며 밥을 챙겨 주었던 갈비집 주방 아주머니나 회사에서 철야를 할 때면 자판기 커피를 뽑아 주며 힘내라던 공장 창고 직원을 잠시 떠올렸지만 그들과는 이미 작별한 사이였으므로 새삼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생각 끝에 나는 두 사서에게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다. 그들은 내가 데스크 뒤편 책장에 사 년 동안 머물게 되므로 사실 자신들과 헤어지는 건 아니니 작별 인사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여자 사서는 나를 영원히 기억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만의 하나 그녀가 세상을 떠나도 내가 선택한 기억 속에 머물게 된 나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영원히 잊히지 않을 거라고 했다. 누군가에게 영원히 기억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꽤나 안심이 되었다.

여드레째 되는 날 오전 8시에 맞춰 시립병원으로 갔다. 모인 사람들 중 다수가 삼사십대로 보이는 남녀들이었는데 대체로 밝은 표정이었다. 명단에 있던 사람 중 두 명은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 간호사는 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며 오 분 이상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간호사는 두 장의 서류와 하얀 면으로 된 긴 원피스를 나누어 주었다. 나는 신체 포기 각서와 장기 기증서에 사인을 했다. 사인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간호사는 주의사항을 이야기했다.

“자, 금속성 물체는 모두 제거하시고요, 옷을 갈아입어 주세요. 기억의 분량에 따라 소요되는 시간이 각각 다르지만 삼십 분 이내면 모두 끝납니다. 그만두고 싶은 분은 말씀해 주세요. 시술 전까지 언제든지 그만두실 수 있어요. 이제 성함을 부르면 두 분씩 차례로 들어가 주세요.”

나는 음식과 음료가 준비되어 있는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나처럼 먹는 일에 별 취미가 없는 사람들인지 아무도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사람들은 별 대화 없이 창 밖의 푸릇한 정원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눈물을 흘리며 사인을 하던 사람 중의 한 명이 대기실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고, 시술 직전에 그만두겠다고 한 사람이 두 명 있어 한 시간 이상 단축되었다. 나는 기다린 지 세 시간 십오 분 만에 무균실로 들어갔다. 흰 가운을 입은 시술자들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오 분의 시간을 주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며 재촉했지만 그들은 말없이 서류를 뒤적이며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벨이 울릴 때까지의 오 분은 내가 살아온 시간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다.

내가 선택한 기억의 한 부분은 몸에서 분리되어 깨끗한 붉은 벨벳 표지로 양장제본되었다. ‘영지(1983~2008)’ 내 요구에 따라 성을 제외한 이름과 생몰년이 금박 고딕체로 새겨졌다. 다른 책들보다 얇은 나는 정기간행물실 데스크 뒤편 책장의 제일 아래 칸 오른쪽에서 여섯 번째에 꽂혔다. 남자 사서는 하얀 면장갑을 낀 손으로 내가 아주 소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아주 조심스럽게 책꽂이에 꽂았다. 그의 손놀림은 아주 부드러웠다. 마음이 놓였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래된 서가와 서가들이 만드는 통로로 둘러싸인 도서관의 구석, 해가 잘 드는 창가에 앉았다. 화장실에 들어앉은 것처럼 편안해져 더 이상 알고 싶은 진실 같은 건 없었다.<끝>
 
 
잊어지는 것들을 기억하려 소설 쓸 것
소설 당선소감 - 정소현
지난달 나는 오랫동안 가족과 함께 살았던 집을 떠났다. 16년 만의 일이었다. 작은 마당이 있는 그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대학교 두 곳을 다녔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일을 시작했던 해 부모님은 우리가 살던 자리에 삼층집을 지었는데, 마당은 없어졌지만 대신 작은 옥탑방이 하나 생겼다. 나는 책상과 책꽂이뿐인 그 방에서 여러 해 겨울을 났다.

그 여러 해 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조용하고 무의미한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날 문득, 지금 죽어도 상관없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 지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나가는 시간과 마음을 기억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한때 함께 살았던 가족을 몇 잃었고, 조용한 시간은 다시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집과 가족을 떠나 숲과 강이 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다. 그 동안 나는 옥탑방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선 통지를 받고 문득 내가 두고 온 그 방을 떠올렸다. 내가 살았던 그 방에는 여전히 책상과 책꽂이가 놓여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갓 서른이 된 내가 꾀죄죄한 얼굴로 소설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나는 그 작은 옥탑방을, 그곳에서 보낸 무의미한 시간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사라지고 잊어지는 것들을 똑똑히 기억하기 위해 소설을 쓸 것이다.

세계를 만나는 방법을 가르쳐주신 박기동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옥탑방에 오랜 세월 따뜻한 불을 지펴주신 부모님, 다 자란 저를 여전히 키워주고 계신 외할머니, 묵묵히 지켜봐주는 조용한 동반자 재홍, 가장 오랜 친구이자 동지 금률, 영감의 원천 김도명씨, 든든한 지원자 지원, 희정, 현정,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꼭 붙잡아준 소설 쓰는 친구들, 그리고 제게 기쁨과 상처를 주었던 사람들,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보던 모두의 눈빛들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작가로서 한 발 내디딜 수 있도록 모자란 제 소설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1975년 서울 출생
▲홍익대 예술학과 졸업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주부

 

 

정제된 문장으로 ‘존재의 그늘’ 예민하게 포착

소설 심사평

소설 최종심사를 맡은 소설가 박범신(왼쪽), 오정희씨. 김호웅기자
최종심에 올라온 10여편 작품 중에서 논의를 거쳐 마지막까지 남은 후보작은 ‘양장제본서 전기(정소현)’ , ‘너는 누구니(최현수)’, ‘너의 식탁(권정선)’ 세 편이었다.

세 편 모두 세련된 문장과 단일한 구조의 소설 미학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러나 ‘너의 식탁’은 감수성 있는 문장으로 소외된 인물의 내면풍경을 차분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볼륨이 너무 얇고 ‘너’와 ‘나’의 관계를 밀도 있게 완성해내지 못했다는 점과, 동묘, 관우상, 어머니 등의 내적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결함이 지적됐다. ‘너는 누구니’ 는 포스트 모더니틱한 서술 기법으로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현대인의 단절감을 드러내 보여준 작품으로 이른바 ‘열린 구조’인데 모든 사건과 캐릭터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만큼 결점이 적은 ‘양장제본서 전기’를 선택하는 데 합의했다. ‘양장제본서 전기’는 잘 정제된 문장으로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존재의 그늘을 예민하게 포착해낸 작품으로, 이야기를 다루는 솜씨나 캐릭터의 형상화, 정통적 기법과 새로운 상상력이 무난하게 결합된, 안정성에 대해 신뢰감이 갔다. 작가로서, 소설을 통한 발언의 진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다른 미덕에 비해 그것은 소소한 결함에 불과했다.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축하하며 정진을 빈다. 소설 쓰기가 이 ‘싸가지’ 없어 뵈는 세상에서 그래도 정말 ‘할 만한 일’이라는 확신을 오래 간직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오정희·박범신